민족말살정책

민족말살정책

[ 民族抹殺政策 ]

요약 우리 민족의 전통과 문화의 뿌리를 말살하려 한 일본의 식민지 지배정책.

일본 제국주의는 한국을 강제 병탄(倂呑)한 후, 강력한 식민지 탄압정책을 채용하였다. 그리하여 이른바 ‘헌병경찰정치’라 하여 헌병경찰을 전국에 배치하여 한국의 민족운동을 탄압하고 통제를 강화하였다. 그러다가 3·1 독립운동이 발생한 후로는 정책에 문제가 있었음을 인식하고 유화정책을 폈다. 즉, 한국인의 문화생활이나 교육 등을 제한적으로 허용하는 정책을 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은 모두가 식민통치의 한 수단일 뿐, 그들의 식민지 통제정책의 근본에는 변함이 없었다.

1930년대에 들어와 일본 군국주의는 대륙침략을 본격화하면서 전쟁에 몰입하게 되었다. 1931년에 만주사변(滿洲事變)을 일으키고, 1937년 중일전쟁(中日戰爭)을 일으켰으며, 1941년에는 미국을 상대로 태평양전쟁(太平洋戰爭)을 일으켜 미국의 하와이, 동남아시아 등을 공격하였다. 전쟁으로 국력의 소진을 드러내면서 그들은 식민지 통치에 새로운 마각을 들어냈다. 즉, 한국을 전쟁물자 보급창으로 사용하려고 하여 이른바 ‘병참기지화’정책을 펴나가면서, 이를 위해서 식민지를 아예 일본의 일부로 만들려는 무서운 ‘민족말살정책’을 수행해나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국인이 한국인으로 있는 것보다는 한국인도 일본인과 똑같은 동일국민 내지는 동일민족의 처지로 개조할 필요가 있었다.

일본의 식민지 지배 정책

민족말살정책 본문 이미지 1
시안사건제2차국공합작난징대학살상하이사변

식민통치 제2기에 해당하는 1919 ~ 1931년 사이에 일본과 한국, 만주를 융화하여 서로 가깝게 지내자는 의미로 내선융화(內鮮融和 일본과 조선이 융화해야 함), 선만일여(鮮滿一如 조선과 만주가 하나와 같음), 일시동인(一視同仁 일본과 조선이 동질성을 가짐) 등의 조금은 부드러운 강령을 내세웠다. 그러나 제3기에 이르러서는 그러한 정책을 좀 더 강화 확대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1932년부터 《조선사(朝鮮史)》를 간행하였는데, 여기서 한국인과 일본인이 동일민족이라는 동조동근론(同祖同根論)을 주장하고 내선일체(內鮮一體 일본과 조선은 하나임)설을 내세웠다.

그리하여 일본민족과 한민족은 시조신인 ‘천조대신’(天照大神)의 적자과 서자로서 하나의 조상을 가진 같은 민족이라고 역사를 날조하였다. 그리하여 한국인을 ‘황국신민화(皇國臣民化)하려고 하여, 일본 왕에 대한 충성을 강요하였다. 전국에 신사(神社)를 세우고 한국인들로 하여금 매일 정오에 신사를 참배토록 하고, 거기서 황국신민서사(皇國臣民誓詞)를 선서하도록 하였다. 한편, 일본 왕이 있는 동쪽을 향하여 절을 하라고 강요하여 이른바 동방요배(東方遙拜)를 실시토록 하였다. 나아가 모든 가정집에는 카미타나(神棚)라고 하는 신이 들어있다는 상자를 만들어 모시고, 거기에 수시로 경배하도록 강요하였다. 이러한 일체의 행위는 한국인의 혼을 말살하고 일본인의 정신을 대신 심으려는 한국혼 말살정책이었다.

다음으로는 제도적으로도 한국인의 모습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일본인으로 만들려는 정책을 실시하였다. 1939년부터 이른바 ‘창씨개명’이라 하여 성과 이름을 일본식으로 만들어 등록하도록 강요하였다. 그리하여 보통 3자로 되어 있는 전통적인 한국인의 이름을 보통 4자인 일본식으로 개명토록 하였다. 만일 일본식 창씨개명을 하지 않으면 취학, 취업, 우편물 이용 등의 공공생활을 규제하거나 신체적 학대를 가하기도 하였다. 이것은 한국인 전통과제도의 말살이었다.

다음은 언어 차원의 민족말살이다. 병탄이후 학교에서 한국인에게 일본어를 가르치더니 점차 강화하여 일본어 교과서를 사용하고, 한국어 교육을 폐지하고 일본어만을 가르쳤다. 그리하여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 어린이들에게 평상시에도 일본어 사용을 강제하여, 어린이들에게 매 달 일정량의 표를 나누어 주고 한국어를 사용할 때마다 그 표를 서로 따먹도록 하여 경쟁시키고 상벌을 가하는 등 온갖 수단을 동원하였다. 일반인에게도 한글을 가르치는 야학, 하계활동 등을 통제하고 반대로 일본어 강습소를 전국에 설치하여 일본어를 가르쳤다. 민간인의 민원서류 등에도 모두 일본어를 사용토록 강제하였다. 또한 한글로 된 신문(동아일보, 조선일보), 잡지(신동아)를 폐간시키는 등 일본어 사용을 강요하였다. 이러한 정책에 한글학자 등은 문화적 저항운동을 하였다. 이에 일제는 한글학자들을 체포 투옥하여 이른바 ‘조선어학회사건’이 발생하였다(1942). 민족혼이 깃든 민족 언어 말살로 한국인을 말살하려고 하였다.

일본은 한국 역사도 말살시키고자 하였다. 한국인은 역사적으로 분열적이고 의타적인 민족이며 나약하여 사대정신이 강한 민족이며, 외침을 많이 받은 열등민족이라고 비하하였다. 또한 옛날부터 일본의 지배를 받아온 한국은 일본의 지배를 받는 것은 당연하며 그래야 안전하다는 식의 왜곡된 역사의식을 심어주었다. 종국에는 한국사 교육을 폐지하고 본국사(일본사) 교육을 강요하였다. 이에 대하여 민족사학자들의 학술단체인 진단학회(震檀學會)는 식민사관을 극복하는 역사 연구를 꾸준히 해나갔다. 조선총독부는 이를 불순하게 여기고 해산토록 강요하여 결국 1942년에 해산되고 말았다.

그 밖에 전쟁 수행을 위해 한국에서 인적·물적 자원을 착취하는 병참기지로 사용하였다. 인적자원 착취로는 징병, 징용, 동원 등을 들 수 있다. 태평양전쟁이 확대되자, 한국 청년들을 전쟁터로 몰아넣었다. 1943년에는 ‘학도지원병제도’를 제정하여 한국인 학생 4500여 명을 지원병 형식으로 전쟁터에 투입하였다. 1944년 전쟁이 어렵게 되자, 보다 강력한 징병제도를 실시하여 패전 때까지 20만여 명을 전쟁터에 내몰았다. 한편, 젊은이들을 전쟁을 지원하는 일터에 투입하였는데, 중일전쟁으로 전쟁이 확산되자 1939년에 ‘국민징용령’을 발하여 한국인 청장년들을 강제로 연행해갔다.

태평양전쟁 이후에는 징용 영장에 의한 인력 모집이 제대로 되지 않자, 트럭을 몰고 다니며 거리나 일터에서 마구잡이로 사람을 잡아갔다. 그래서 아무도 몰래 잡혀가는 경우도 있고, 트럭에서 뛰어내려 도망가 목숨을 건지는 경우 등 비애가 많았다. 인력동원에는 성별 나이에 무관하게 마구잡이로 동원하여 일터로 내몰았다. 중학생은 물론 국민학생까지도 ‘근로보국’ ‘근로동원’이라는 이름으로 잡아가서 군사 시설 공사장으로 투입하였다. 그리고 심지어는 '여자정신대근무령(女子挺身隊勤務令)'을 공포하여 12 ~ 20세의 젊은 여성까지도 잡아가 군수공장에서 노역시키고 일부는 동남아시아 전쟁터로 투입하여 ‘군대위안부’라는 성노예로 학대하여 세계 역사에 유래없는 잔악한 만행을 저질렀다. 그리고 전쟁물자로 사용하기 위해 각종 지하자원, 기름, 놋쇠그릇, 곡식 등을 약탈해갔다. 총알, 대포를 만들기 위해 가정용품인 놋쇠수저까지 약탈하고, 비행기용 온갖 기름 대체유류를 마구잡이로 수탈해갔다.

그러나 민족정신을 잃지 않으려는 애국자 애국민족은 그들의 눈과 손을 피해 우리의 민족성을 보존 유지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여 민족을 지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