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폐

엄폐

[ occultation ]

엄폐(occultation)는 천구 상에서 어떤 한 천체가 다른 천체 뒤에 숨어 보이지 않게 되는 현상이다. 엄폐가 일어나려면 앞에서 가리는 천체의 각크기가 숨는 천체의 각크기보다 커야 한다. 이와 달리 각크기가 작은 천체가 각크기가 큰 천체의 앞에서 움직이며 일부만을 가리는 것을 통과(transit)라고 한다. 엄폐 현상을 이용하면 태양계소천체의 궤도요소, 대기의 수직구조, 항성의 크기 등을 결정할 수 있다.

목차

엄폐와 통과

엄폐는 대개 태양계 천체가 별이나 다른 태양계 천체를 완전히 가리는 현상을 일컫는 것으로, 각크기가 큰 천체가 작은 천체 앞을 지날 때 발생한다. 반대로 각크기가 작은 천체가 큰 천체 앞을 지날 때는 배경 천체의 일부 만을 가리는데, 이는 통과(transit)라고 한다. 외계행성이 중심별 앞을 지나거나 태양계 내행성(수성과 금성)이 태양 앞을 지나는 경우가 이에 속한다. 그림 1 동영상은 엄폐와 통과의 차이를 보여 준다.

그림 1. 엄폐와 통과의 차이를 보여주는 동영상. 위 두 그림에서 노란색 원은 배경별을, 회색 원은 그 앞을 지나는 천체를 나타낸 것이다. 아래 두 그림은 각 경우의 광도곡선을 보여준다.(출처: 표정현/한국천문학회)

어떤 태양계 천체가 엄폐를 일으키는 빈도와 엄폐의 지속시간은 그 태양계 천체의 각크기와 천구 상에서의 이동 속도에 의하여 결정된다. 각크기가 클수록 빈도와 지속시간이 함께 늘어나고, 이동 속도가 빠를수록 빈도는 늘어나지만 지속시간은 짧아진다. 따라서 달에 의한 엄폐 현상이 가장 자주 발생하며 달이 태양계 행성을 가리는 엄폐도 종종 발생한다.

엄폐를 이용한 과학 연구

엄폐 현상을 이용하면 태양계 천체에 대하여 아래와 같은 연구들을 할 수 있다.

태양계 소천체, 특히 태양에서 멀리 떨어진 소천체에 대해서는 궤도 요소가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경우가 많은데, 기존에 알고 있던 궤도 요소로 예측한 엄폐 발생 시각과 실제 발생 시각을 비교하여 궤도 요소의 오차를 줄일 수 있다. 또한 지구의 여러 위치에서 엄폐를 관측하면 각 위치에서 배경별 방향의 시선이 소천체의 각기 다른 위치를 지나게 되어 엄폐가 일어나는 시각이나 지속 시간 등이 달라지는데, 이를 이용하여 그 천체의 모양과 크기를 알 수 있다. 만약 소천체에 의하여 배경별이 완전히 가려지기 직전과 다시 나타난 직후에 별의 밝기가 잠깐 어두워지는 현상이 나타나면 이는 이 소천체 주변에 고리가 있다는 직접적인 증거가 된다. 최근의 예로는 2017년 1월 왜소행성 하우메아(Haumea)에 의해 발생한 엄폐를 들 수 있다. 이 현상으로부터 하우메아가 매우 찌그러진 타원 모형을 띄고 있고 그 주변에 너비가 약 70 km인 고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우메아의 궤도 장반경이 약 43 AU(근일점 약 35 AU, 원일점 약 51 AU)로, 지상 관측으로는 이러한 정보를 얻을 수 없다. 그림 2 동영상은 2013년 6월 발생한 센타우루스 소행성 커리클로(Chariklo)에 의한 엄폐 현상의 영상과 이로부터 얻은 배경별의 광도곡선을 나타낸 것이다. 배경별이 완전히 가려지기 전과 후에 별의 밝기가 어두워지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림 2. 센타우루스 소행성 커리클로(Chariklo)에 의한 엄폐 영상과 배경별의 광도곡선 (출처: ).

대기를 가지고 있는 태양계 천체에 대하여 엄폐가 발생할 경우에는 이 천체의 대기에 대하여 연구할 수 있다. 배경별이 태양계 천체에 의하여 완전히 가려지기 전에 별의 밝기가 변하는 것을 관측하여 대기의 수직구조를 알아낼 수 있다. 명왕성의 경우 2015년 뉴 호라이즌(New Horizons) 호가 가까이 지나면서 대기 구조를 연구할 수 있는 영상을 촬영했지만 그 이전에도 엄폐 현상을 이용한 연구가 다수 이루어졌다.

엄폐 현상은 배경별에 대한 연구에도 활용된다. 배경별도 각크기를 가지기 때문에 엄폐가 일어날 때 밝기가 완전히 어두워지는데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린다. 이 시간으로부터 배경별의 각크기를 구할 수 있고, 이 별까지의 거리가 이미 알려져 있다면 별의 물리적 크기도 구할 수 있다. 이때 엄폐를 일으키는 천체로는 달이 주로 이용된다. 하지만 별의 밝기가 어두워지는데 걸리는 시간을 분해해 볼 수 있을 만큼 빠른 카메라가 필요하고, 달 표면에 의한 별빛의 회절을 보정해야 하기 때문에 각크기가 큰 별에 대해서만 이 방법을 적용할 수 있다. 배경별이 쌍성인 경우 두 별이 차례로 가려지므로 밝기가 어두워지는 시간 간격으로부터 이 둘 사이의 겉보기 거리를 매우 정확히 측정할 수 있다. 배경별 주변에 별을 둘러싸고 있는 원반 등이 있는 경우에는 이들의 크기나 모양을 추정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