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경의 역사

편경의 역사

요약 편경(編磬)은 고대 중국에서부터 사용되기 시작한 악기로, 중국 주나라 시대부터 아악기의 하나로 포함되었다. 우리나라에는 고려 예종 11년(1116년)에 처음 전해졌으며 조선 태종 때까지 중국에서 제작한 악기를 들여왔으나, 세종 9년(1427년)부터 독자적으로 편경을 제작할 수 있게 되었다.

1. 편경의 기원과 발전

편경(編磬, bianqing)은 고대 중국에서부터 사용되기 시작했다. 신화시대라고도 하는 (三皇五帝) 시대에 처음 제작되었다는 설도 있지만,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중국 최초의 왕조인 상나라(은나라, 기원전 1600~1046년) 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까지 발굴된 사료로 보자면, 기원전 2,000년경부터 원시적 형태의 경(磬)이 사용되었다.

이 시기의 경은 40~100cm 사이의 다양한 크기와 형태로 만들어졌다. 기원전 1,200년경부터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3~5개의 경으로 구성된 악기가 헤난성 북부 안양시에서 발굴되었는데, 이전 시기의 경들과 달리 세심하게 연마한 대리석 재질이었으며, 직사각형 혹은 삼각형 형태로 다듬어져 있었다. 이 경들의 표면에는 호랑이나 물고기 등의 무늬가 새겨져 있다.

편경은 상나라를 무너뜨리고 새롭게 들어선 주나라(기원전 1046∼771년) 시대부터 편종(編鐘, bianzhong)과 함께 아악기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주나라 중기인 기원전 5세기경부터 악기의 크기가 확대되고 형태도 규범화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전 시대와는 달리 경의 표면에 무늬를 새기는 관습은 드물었다. 이 시기에 제작된 편경 중 가장 규모가 큰 것은 기원전 433년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유물은 후베이 지역에서 발굴된 것으로, 증나라의 제후 을(曾侯乙, 기원전 477~433년경)의 무덤에 부장품으로 포함된 것이다. 편경이 부장되는 관습은 무덤 주인의 신분을 과시하기 위한 것으로, 편경의 희소성과 문화적 의미를 짐작케 한다. 이 무덤에서 발굴된 편경은 모두 32개의 곡척형(‘ㄱ’자 형태) 경이 두 개의 단에 매달린 형태로, 각각의 경은 5개의 면으로 깎여 있다. 이 편경은 음높이가 다른 38개의 음을 연주할 수 있도록 제작된 것으로, 너비 215cm, 높이 109cm의 거대한 규모를 자랑할 뿐 아니라 수준 높은 예술적 감각을 보여준다.

후베이에서 발굴된 편경

후베이에서 발굴된 편경 후베이성 박물관 소장

주나라에서 사용된 편경은, 경의 두께를 동일하게 유지하되 그 크기를 달리 하여 반음계의 음정들을 낼 수 있도록 제작되었다. 즉 경의 크기가 작을수록 높은 음고를 소리낼 수 있다. 타이베이의 유교사원에서는 아직도 이러한 형태의 편경을 사용하고 있다.

주나라 초기에 에 사용되는 악기들을 제작하고, 이를 소재에 따라 금(金) · 석(石) · 목(木) · 토(土) · 혁(革) · 죽(竹) · 포(匏) · 사(絲)의 8음으로 분류했다. 이중 석부(石部)는 영속성과 불멸을 상징하기 때문에 이에 속하는 편경은 제례악에서 매우 중요한 악기로 여겨졌다.

그러나 남북조 시대(439~589년)에 이르러 외국 음악인 (胡樂)이 유행하면서 아악은 점차 쇠퇴하였다. 그리하여, 수나라(581~618년)와 당나라(618~907년) 시대에 대대적인 아악 정비 작업이 진행되었다. 이 시기의 아악 정비에 대해서는 북송의 음악가 진양(陳暘, 1068~1128)이 쓴 『악서』(1101년), 마단임(Ma Tuan-lin, 馬端臨, 1254~1323)이 쓴 백과사전 『문헌통고』(1319년)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특히 진양은 재정비된 당나라의 아악을 자세히 기술하였다. 그는 아악을 악현(樂縣)과 등가(登歌)로 나누어 설명하는데, 악현은 제사를 지내는 사당의 뜰에서 연주되는 기악합주이며 등가는 이 합주에 맞추어 노래하는 것을 의미한다.

악현의 구성은 제사를 주재하는 사람의 지위에 따라 네 가지로 구분된다. 황제가 지내는 것은 궁현, 제후가 지내는 것은 헌현, 경대부가 지내는 것은 판현, 사(士)가 지내는 것은 특현이라고 부른다. 악기 편성과 배치도 각각 다르다. 황제는 동서남북의 4면에, 제후는 동서북의 3면에, 경대부는 동서의 2면에, 사는 북쪽에만 악현을 설치할 수 있다. 이러한 구성은 이후 조선으로 전해져, 헌가(軒架)의 구성에 동일하게 적용되었다.

등가에서는 현악기와 관악기가 연주된다. 악기들은 사각형으로 배치되는데, 가운데에는 여덟 가지 관악기와 한 가지 타악기(부缶)가 각각 12개씩 아홉 줄로 배치된다. 다른 악기들은 그 둘레에 배치되는데, 편종, 특종(特鐘), 편경, 특경(特磬)이 4면에 각각 세 틀씩 배치되고, 세 가지 북은 네 모서리에 배치된다.

진양이 이처럼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는 아악의 재정비 시기, 즉 12세기경부터 편경은 동일한 크기의 경 16개로 제작되었다. 크기는 같지만 경의 두께를 달리함으로써 16개의 반음을 소리낼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우리나라에 전파된 편경은 바로 이 형태의 편경이며, 이러한 구성이 표준 형태로 자리 잡으면서 청 왕조에서도 동일한 형태의 편경을 계속 고수했다.

2. 편경의 한국 전래

1) 고려시대의 편경

편경이 우리나라에 전해진 것은 고려 예종 11년인 1116년으로, 이보다 2년 앞선 1114년에 송나라의 (大晟雅樂) 을 들여온 것이 계기가 되었다. 예종 9년, 송나라에 갔던 사신 안직숭(安稷崇)은 송의 휘종(徽宗, 재위 1100∼1125)이 하사한 악기와 곡보(曲譜)를 가지고 돌아왔다. 이 때 들여온 악기는, 철방향(鐵方響), 석방향(石方響), 비파, 오현(五絃), 쌍현(雙絃), 쟁, 공후, 피리, 적(笛), 지(篪), 소(簫), 포생(匏笙), 훈(壎), 대고, 장구, 박판(拍板) 등이었으며 10부의 곡보와 악기연주법을 담은 지결도(指訣圖) 10점도 함께 전해졌다.

예종은 이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1116년에 하례사(賀禮使)로서 왕자지(王字之)와 문공미(文公美)를 파견했고, 휘종은 대성아악을 연주하는 데 필요한 등가악기(登歌樂器)와 헌가악기(軒架樂器)를 대량으로 하사했다. 이 때 전해진 악기는 금(琴) · 슬(瑟) · 소(簫) · 생(笙) · 화(和) · 우(竽) · 소(簫) · 관(管) · 훈(壎) 등의 악기가 각각 2부씩이었고, 등가(登歌)에 (正聲)과 중성(中聲)의 편경 각 한 틀, 헌가(軒架)에 정성과 중성의 편경 각 아홉 틀씩이었다. 이렇게 수입된 아악기들은 처음 전해진 예종 9년에 왕이 친히 태묘(太廟)에서 송의 새로운 음악을 아뢴 것을 시작으로 하여, 풍년을 기원하는 사직(社稷)과 동지에 제사를 지내던 원구(圜丘), 국빈을 대접하는 연향 등에 사용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악기들이 손상되었으며, (大樂署)와 (管絃房)의 악공들을 제대로 훈련시킬 역량을 가진 교사도 부족했다. 이러한 난국을 타개하고자 승지 서온(徐溫)이 송나라로 건너가 연주법을 익히고 돌아와서 악공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공민왕 8년(1359년)에 홍건적이 고려를 침범한 이후, 편경과 편종 등 대부분의 악기들이 소실되었다. 그리하여 공민왕 19년(1370년)에 성희득(成淮得)이 명나라로부터 아악기들을 들여왔는데, 이 악기들과 송나라에서 들여온 대성악기가 함께 사용되면서 대성악의 성격이 모호해졌다. 이러한 혼란을 바로잡기 위해 공양왕 1년(1389년)에 악학(樂學)을 설립하고 1391년에 아악서(雅樂署)를 설립하는 등 노력을 기울였지만, 이듬해인 1392년에 고려가 멸망하면서 명맥이 끊어지는 듯했다. 그러나 악학과 아악서의 노력은 조선 왕조에서도 계속되었고, 태종 때에도 명나라로부터 다양한 악기들을 들여와서 궁중 제례악에서 연주하였다.

2) 조선시대의 편경

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고려의 종묘악 전통을 계승하여 종묘제례악을 연행했다. 억불숭유(抑佛崇儒)를 통치이념으로 삼았던 조선시대에는 공자의 을 담은 과 의 중요성이 커졌고, 따라서 아악에서 중요한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었던 편경의 역할이 더욱 부각되었다.

태종 때까지는 명나라(136~1644년)에서 편경을 들여와 아악을 연주했지만, 수입된 편경을 완전한 상태로 유지하기는 힘들었다. 특히 편경의 수는 제례를 주재하는 왕의 지위를 상징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 수가 부족해서는 안 되었다. 편경의 수와 배치는 앞서 살펴본 중국의 악현구성을 따르는데, 당시 조선은 중국의 황제를 천자로 섬겼기 때문에 헌현(軒懸)의 구성을 따랐다. 즉 편경을 동 · 서 · 북 세 곳에 세 틀씩 모두 아홉 틀을 설치해야 했다. 따라서 편경이 파손될 경우 기와로 구운 와경을 대신 사용해야 했다. 그러나 와경의 소리는 악기로 사용하기에 부적합했기 때문에, 연주를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아홉 틀이라는 구성을 갖추기 위한 것에 불과했다.

급기야 세종 7년(1425년)에 이르면, 중국에서 보내온 석경으로 된 편경은 단 한 틀만이 남은 상황에 이른다. 한 해에 수차례 연행되어야 하는 제향악을 이러한 상태로는 감당하기 힘들었고, 세종은 편경의 자체 제작을 진지하게 고려하기 시작했다. 마침 이 시기에 경기도 남양(현재의 화성)에서 경석이 발굴되었고, 이듬해 봄부터 편경 제작에 본격적으로 착수하게 되었다. 남양에서 발굴된 경석은 중국산 옥돌보다 훨씬 입자가 균일해서 더욱 맑은 소리를 낼 수 있었다. 세종은 이 경석을 매우 귀하게 여기고 어보(왕실 도장)의 재료로도 사용했다. 이후 경석은 궁중옥이라고 불리면서 조선왕조를 상징하는 돌로 여겨졌다.

편경의 제작은 경석의 발견과 함께 시작되었지만, 사실 세종 재위 초기부터 진행된 아악 정비사업의 일환이자 그 정점이라 할 수 있다. 세종은 고려와 구분되는 새 왕조의 음악으로서 예악사상을 반영한 (五禮)에 따른 아악을 구상했다. 아악 정비 사업은 아악기의 제조와 함께 완성되었는데, 아악기의 제조는 정확한 기준음고를 잡아줄 수 있는 율관(律管)의 제작이 선행되어야 가능한 것이었다.

이 핵심적인 율관을 제작한 것은, 당시 음악의 실제와 이론에 가장 뛰어난 인물이었던 박연(朴堧, 1378~1458)이었다. 그는 중국 율관과는 차별화된 조선만의 율관을 제작하려 했다. 1425년에 처음으로 제작한 율관은 중국과 마찬가지로 곡식인 기장의 알갱이를 대나무 통에 집어넣어 만들었지만, 기장 알갱이가 고르지 않아 황종의 음고를 맞출 수 없었다. 그는 기장 대신 밀랍을 낱알형태로 만들어 다시 한 번 율관제작을 시도하여 성공했으나, 자연물이 아닌 인위적인 재료를 사용했다는 이유로 이를 실패로 인식했다. 결국 그는 독자적인 율관을 포기하고 중국의 황종음에 맞도록 율관을 제작했으며, 이후 습도에 민감한 대나무로 만든 죽율관(竹律管) 대신 동율관(銅律管)을 제작했다.

율관

율관

율관은 1427년(세종 9년)에 완성되었고, 이때부터 편경 제작이 본격화되었다. 편경 제작을 위해 특별히 설치된 악기도감(樂器都監)에서는 그 해 12매짜리 편경 한 틀을 완성했다. 처음 완성된 편경을 시연할 때, 세종은 그 청아한 소리에 감탄하다가 아홉 번째 음인 이칙(夷則)의 음고가 조금 높다고 지적했다. 박연이 놀라 확인해보니 이칙음을 내는 경에 먹선이 남아있음을 발견했다. 즉 두께에 따라 음고를 조절하는데 이칙음을 내는 경이 덜 갈려 있었던 것이다. , , 등 직접 음악을 작곡했던 세종의 음악적 재능을 엿볼 수 있는 일화이다. 특히 여민락은 세종이 편경을 에서도 활용하고자 작곡한 곡이다.

세종 10년(1428)년에 이르면, 모두 528매의 경이 완성됨으로써 수십 틀의 편경이 제작될 수 있었다. 이로써 세종 시대의 아악정비작업은 정점에 이르게 되었다. 처음 박연이 율관을 완성했을 때는 중국의 진양이 쓴 『악서』에 근거하여 12율을 내도록 만들었으나, 세종 중기 이후는 12율 4청성을 내도록 만들었다. 아악이 정비되고 저술된 『악학궤범』에는 편경의 크기를 척, 촌, 푼의 단위로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으며, 왼손과 오른손의 자세한 주법을 설명하고 있다. 편경이 완성되면서 비로소 편종의 제작이 시작될 수 있었고, 편경의 음고를 기준음고로 삼는 다른 아악기들도 제작되기 시작했다.

박연 초상화 (국립국악원 소장)

박연 초상화 (국립국악원 소장) 출처 : 한겨레음악대사전 -

편경은 재료가 귀하고 제작이 어려운 만큼 매우 귀중하게 관리했다. 『경국대전』(1485년)에는 편경을 훼손한 자에게는 곤장 100대와 3년의 유배형에 처한다고 규정하고 있어, 편경의 관리에 만전을 기했음을 알 수 있다.

편경은 영조 시대에도 두 차례 제작되었고, 순조 및 헌종 시대에도 제작되었다. 편경은 제작 시기의 도량형 기준에 따라 음고가 달라진다. 세종 시대의 황종은 C5의 음고에 가까운 데 비해, 헌종 시대인 1848년에 제작된 편경의 황종은 A#5에 가깝다.

20세기에 들어서는 1935년 에서 조선총독부의 요청으로 편종, 편경 각 한 틀을 만들어 만주국의 건국기념 선물로 보낸 적이 있다. 이왕직아악부에서 제작한 편경은 현재 국립국악원에 소장되어 있다. 국립국악원은 1980년, 편종 · 편경 제작자문위원회를 구성하여 국악의 기본음을 측정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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