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가 하늘이여 땅이여, ‘버티고’

여기가 하늘이여 땅이여, ‘버티고’

주제 생명과학
칼럼 분류 일반기사
칼럼 작성일 2007-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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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20일 최신예 전투기 KF-16D가 서해에 추락했다. 사고기에는 두 명의 조종사가 타고 있었다. 특히 박인철 대위는 부친 고 박명렬 소령에 이어 전투기 사고로 목숨을 잃어 주위를 안타깝게 하고 있다. 아무리 최신 전투기에 탄다고 해도 조종사들은 항상 사고의 위험에 노출돼 있다. 일반인이 상상할 수도 없는 극한의 조건에서 전투기를 몰기 때문이다.

조종사들은 고공의 옅은 산소 농도, 급격한 기압 변화, 가속도로 인한 힘을 온 몸으로 받아내야 한다. 마치 고산지대 사람이 겪는 산소 부족, 잠수부들이 겪는 압력 변화, 롤러코스터를 탄 사람이 겪는 가속도를 한꺼번에 경험하는 셈이다. 이들의 고충을 살펴보자.

조종사가 활동하는 공간은 대개 해발 3000~4000m 이상으로 대기가 희박하다. 산소가 충분할 때는 대기압이 폐의 압력보다 훨씬 커 혈액 속에 산소가 잘 녹아들지만, 산소가 부족한 곳에서는 폐 속의 압력이 떨어지고 혈액 속 산소량도 부족해진다. 7000m 이상 올라가면 흡수할 수 있는 산소량이 확 줄어들고, 1만5000m까지 올라가면 대기압이 폐 속의 압력과 같아져 아예 산소를 흡수할 수 없다. 그래서 평균 4000m 이상의 고공에 오르는 조종사는 산소마스크를 써야 한다.

산소가 부족한 상태에 계속 노출되면 어떻게 될까? 정신이 멍해지다가 판단력이 떨어지고 의식도 흐려진다. 그런데 조종사는 이걸 고통이 아닌 ‘쾌감’으로 받아들인다. 일종의 환각상태에 빠지는 것이다. 실제 조종사에게 공급하는 산소량을 점점 줄이면서 자기 이름을 반복해서 쓰도록 하는 실험을 했더니 또박또박하던 글씨가 곧 필기체로 변한 뒤 상형문자를 밟고 지렁이 몇 마리로 변신했다. 그러나 조종사는 이 모든 과정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이런 상태로 전투기 조종간을 계속 잡고 있으면 위험한 사고가 발생할 수 있다. 그래서 조종사는 고공과 똑같은 상태로 만든 감압실에서 저산소증을 체험하고 대비하는 훈련을 받는다.

공기가 희박하면 공기가 누르는 힘, 즉 기압도 약해진다. 늘 1기압에 노출돼 있던 신체는 기압이 조금만 변해도 부적응 반응을 보일 정도로 섬세하다. 우리가 호흡하는 공기의 80퍼센트는 질소로 되어 있다. 이 질소는 작은 기포로 변해서 혈액과 조직 속에 녹아 있다. 그런데 압력이 급격하게 내려가면 기체의 용해도도 내려가기 때문에 몸속에 갇혀 있던 질소가 녹아나온다. 마치 마구 흔든 콜라처럼 기체가 부글부글 끓어 나오는 셈이다.

자유의 몸이 된 질소 기체는 조직 속에 모여 수포를 만들거나 모세혈관을 막는다. 이러면 세포가 산소를 받을 수 없기 때문에 신체는 치명적인 손상을 입는다. 질소 기체가 뇌혈관 같은 곳을 막아버리면 의식을 잃을 수도 있다. 공중에서 조종사가 기절하면 전투기는 추락할 수밖에 없다.

또 조종사들은 전투기가 너무 빠르기 때문에 엄청난 힘을 받는다. 고속으로 움직이는 물체에서 사람이 받는 힘은 몸무게와 가속도의 곱이다. 따라서 가속도가 클수록 사람은 큰 힘을 받는다. 이 힘은 물체 이동 방향과 반대 방향으로 걸린다. 엘리베이터가 내려갈 때 순간 몸이 붕 뜨고, 반대로 올라갈 때 바닥에서 당기고 있는 느낌을 받는 것과 같은 원리다.

전투기 조종사는 상승할 때는 발, 하강할 때는 머리 방향으로 힘을 받는다. 이중 하강할 때 머리 방향으로 받는 ‘양성 가속도’가 조종사를 괴롭히는 가장 큰 원인이다. 최신예전투기 조종사가 받는 양성 가속도는 최고 11~12G. 지구 중력이 1G니 지구 12개가 떼거리로 모여 한 사람의 머리를 잡고 마구 끌어당기고 있는 셈이다.

양성 가속도가 걸리면 관성 때문에 체내 혈액은 발로 쏠린다. 뇌에 있던 혈액이 한꺼번에 하체로 빠져나가면 조종사는 정신을 잃을 수 있다. 이를 ‘G-LOC’이라 한다. G-LOC 상태에 빠지면 24초 이상 정상적인 행동이 불가능해지므로 치명적이다. 미국 공군이 발표한 통계조사에 따르면 매년 1.45대가 G-LOC으로 추락한다고 한다.

양성 가속도는 조종사의 판단능력도 없앤다. 사람은 무의식중에 중력으로 상하를 판단한다. 다리 방향으로 가속도가 걸릴 때는 정상방향을 인지하지만 다르게 걸리면 몸도 혼란을 일으킨다. 양성 가속도가 1G를 넘어간 순간부터 머리 쪽에 더 큰 힘이 가해지기 때문에 조종사가 느끼는 땅은 하늘이 된다. 공중에서 몇 바퀴나 도는 전투기 곡예에 지상에 있는 사람은 현기증이 나도 조종사는 자신이 바른 자세로 앉아있다고 느낀다.

하지만 이 상태에서 감각만 믿고 상하를 판단하면 극히 위험하다. 푸른 바다 위를 날 때 내 발밑에 있는 게 하늘인지 바다인지 제대로 판단하지 못 하기 쉽다. ‘버티고’(vertigo)라고 불리는 이 착시현상을 피하기 위해 조종사는 시각이나 몸의 느낌이 아니라 계기판을 보고 비행한다. 기계는 적어도 혼란 때문에 상하 판별을 잘못하진 않기 때문이다.

체력과 지력, 판단력을 갖춘 ‘탑건’도 자연의 힘 앞에서는 무력하다. 그러나 그들은 머리와 몸이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조종간을 놓지 않는다. 자신이 떠나 텅 빈 하늘에 새들만 평화롭게 노닐지는 않을 것을 알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잠시라도 정신을 놓으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힘든 장소에서도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하고 있는 창공의 사나이들에게 감사와 격려의 말을 전하는 바다.

  • 김은영 - 과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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