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분니질금

조분니질금

분류 문학 > 인물 > 왕

기본정보

신라의 제11대 왕.
생몰년 : ?-247년
재위기간 : 230년-247년

일반정보

신라 제11대 왕으로 조분왕(助賁王) 혹은 제분왕(諸賁王)이라고도 하며 성은 석씨이다. 벌휴이사금의 태자인 골정갈문왕(骨正葛文王)의 아들이자 벌휴이사금의 적손(嫡孫)이며 조분이사금의 사위이다. 이 왕대에 신라는 감문국(甘文國)과 골벌국(骨伐國)을 병합하였다.

전문정보

『삼국유사』 권1 왕력편에서는 조분니질금(助賁尼叱今) 외에도 조분왕(助賁王), 제분왕(諸賁王) 등 다양한 이칭이 등장하나 구체적인 서술은 누락되었다. 『삼국사기』 권2 신라본기2에서는 그를 조분이사금(助賁尼師今)이라고 하였다.

『삼국사기』 권2 신라본기2 조분이사금 즉위년조에 따르면 그는 벌휴이사금의 손자이자 골정갈문왕(骨正葛文王)의 아들이다. 또한 어머니는 구도갈문왕(仇道葛文王)의 딸 옥모부인(玉帽夫人) 김씨이고, 비는 나해이사금의 딸 아이혜부인(阿爾兮夫人)이다. 나해이사금이 유언으로 사위인 조분에게 왕위를 잇도록 하였다.

조분이사금대 신라는 활발하게 주변국을 정복해 나갔다. 『삼국사기』 권2 신라본기2 조분이사금 2년(231)조에는 “이찬 우로를 대장군으로 삼아 감문국을 토벌하여 함락시키고 그 땅을 군으로 삼았다(以伊?于老爲大將軍 討破甘文國 以其地爲郡)”라고 하였다. 감문국은 지금의 경상북도 김천시 개녕면 일대에 비정되며 경주에서 추풍령(秋風嶺)을 통해 서북쪽 백제지역으로 진출하는 길목에 해당한다.(이형우, 2000)

또한 조분이사금 7년(236)조에는 “골벌국왕(骨伐國王) 아음부(阿音夫)가 무리를 이끌고 와서 항복하였으므로 집과 토지를 주어 편히 살게하고 그 땅을 군으로 삼았다(骨伐國王阿音夫 率衆來降 賜第宅·田莊安之 以其地爲郡)”라는 기록도 보인다. 골벌국은 현재의 경상북도 영천 지역으로, 의성의 소문국(召文國), 대구의 다벌국(多伐國), 개령(開寧)의 감문국(甘文國) 등 주변의 나라들이 모두 신라에 복속되면서 고립을 면할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골벌국왕은 어쩔 수 없이 신라에 항복한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박대재, 2006)

참고문헌

이형우, 2000, 『新羅初期國家成長史硏究』, 영남대학교 출판부.
박대재, 2006, 『고대한국 초기국가의 왕과 전쟁』, 경인문화사.

관련원문 및 해석

第十一助賁尼叱今.
제11대 조분니질금.

第十二理解尼叱今 [一作?解王 昔氏 助賁王之同母弟也 丁卯立 理十五年 始與高麗通聘]
제12대 이해니질금. [또는 점해왕이라고 한다. 석씨로 조분왕의 동모제이다. 정묘년(247)에 즉위하여 15년을 다스렸다. 고구려와 더불어 사신을 교환하기 시작하였다.]

第十三未鄒尼叱今 [一作味炤 又未祖 又未召 姓金氏 始立 父仇道葛文王 母生乎 一作述禮夫人 伊非葛文王之女 朴氏 妃諸賁王之女光明娘 (壬)午立 理二十二年]
제13대 미추니질금. [혹은 미소, 미조, 미소라고도 한다. 성은 김씨인데 (김씨로는) 처음으로 즉위하였다. 아버지는 구도갈문왕이고 어머니는 생호 또는 술례부인으로 이비갈문왕의 딸로써 박씨이다. 왕비는 제분왕의 딸, 광명랑이다. 임오년(262)에 즉위하여 22년간 다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