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효각간

충효각간

분류 문학 > 인물 > 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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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신라 제43대 희강왕의 장인이자 신라 제44대 민애왕의 아버지
생몰년: 미상

일반정보

신라 제43대 희강왕(僖康王)의 장인이자, 신라 제44대 민애왕(閔哀王)의 아버지. 제 38대 원성왕(元聖王)의 손자로 제39대 소성왕(昭聖王), 제41대 헌덕왕(憲德王), 제42대 흥덕왕(興德王)과 김충공(金忠恭)은 모두 형제이다.

헌덕왕 9년(817)부터 동왕 13년(821)년까지 약 4년간 시중(侍中)을, 그리고 동왕 14년(822)부터 흥덕왕 10년(835)까지 약 13년간 상대등(上大等)을 역임하였다. 헌덕왕 14년(822) 김헌창의 반란이 일어나자 그 진압에 나서 군공(軍功)을 세우기도 하였다.

형인 김수종(金秀宗)이 신라 제42대 흥덕왕으로 즉위하자, 왕의 정치적 후원자로서 실권을 장악하였고 후사가 없던 흥덕왕의 사후, 왕위계승이 유력시 되었다. 그러나 흥덕왕보다 먼저 사망함으로써 인겸태자계가 독점하였던 왕위계승에 예영계가 참여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였다. 후에 아들 44대 민애왕에 의해 선강대왕(宣康大王)으로 추봉되었다.

전문정보

인겸태자(仁謙太子)의 넷째 아들로 이름은 충공이다. 신라 제38대 원성왕의 아들 인겸태자에게는 네 아들이 있었는데, 각각 제39대 소성왕, 제41대 헌덕왕, 제42대 흥덕왕, 김충공이다. 후사가 없었던 흥덕왕에 비해 충공은 자손을 많이 두었는데, 딸들 중 한명은 신라 제43대 희강왕의 비가 되었고, 다른 한명은 김균정의 후처가 되어 제47대 헌안왕을 낳았다. 또한 그의 아들 명(明)은 신라 제44대 민애왕이다.

『삼국유사』왕력에는 제43대 희강왕의 비 문목부인의 아버지를 충효각간 또는 중공각간으로 기록하고 있으며(妃文穆王后 忠孝角干之女 一云重恭角干),『삼국사기』권10 신라본기 10 희강왕 원년조(836)에는 희강왕의 비 문목부인의 아버지를 갈문왕(葛文王) 충공(忠恭)으로 기록하고 있다.(妃文穆夫人 葛文王忠恭之女) 희강왕의 비가 문목부인임은『삼국유사』와『삼국사기』가 동일하게 기록하고 있으므로 문목부인의 아버지로 나타나는 충효(忠孝), 중공(重恭), 충공(忠恭)은 모두 동일인물임을 알 수 있다.

김충공은 헌덕왕 9년(817)부터 동왕 13년(821)년까지 약 4년간 시중(侍中)을 역임하였으며 헌덕왕 14년(822)년 1월 형인 김수종(흥덕왕)이 부군(副君)이 되어 상대등 자리에서 물러나자, 그를 대신하여 상대등의 지위에 올랐다. 그로부터 두 달뒤 김헌창의 반란이 일어나자 반란 진압에 적극 대처하여 공을 세웠으며, 정사당(政事堂)에서 직접 정무를 총괄하였다. 그리하여 흥덕왕 즉위 후에도 흥덕왕 10년(835)까지 약 13년간 상대등(上大等)을 역임하면서 계속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였다.

흥덕왕은 즉위 당시(826) 이미 50세의 고령이었고, 또 즉위한지 2개월만에 왕비를 잃고 상심하여 재취까지 단념하면서 후사가 없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후계자로 예정되었던 사람은 왕의 동생으로 흥덕왕의 정치를 보좌하였던 상대등 김충공(金忠恭)이었다.

그런데『삼국사기』권10 신라본기10 흥덕왕 10년조(835)를 보면 김충공 다음으로 김균정이 상대등의 지위에 취임하였음을 볼 수 있다. 김균정은 그동안 왕위를 독점했던 인겸태자의 직계손이 아니라 원성왕-예영-균정으로 이어지는 가계의 인물로 방계에 해당한다. 이러한 인물이 인겸태자의 직계손인 김충공 다음으로 상대등에 임명된 것은 선뜻 납득하기 힘들다. 당시 흥덕왕에게는 후사가 없었기 때문에 상대등의 임명은 곧 후계자 지명과 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인사조치는 김충공의 사망에 따른 어쩔 수 없는 조치로 생각된다. 흥덕왕에게 후사가 없고, 김충공마저 사망했다면, 인겸태자계 내에서는 더 이상 왕위를 적합하게 이을 수 있는 인물이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김충공의 아들 명(明)이 있긴 했지만, 흥덕왕 10년(835) 당시 명은 19세로 아직 국정을 책임지기에는 어린 나이였다. 따라서 김충공의 사망을 직접적을 언급한 사료는 없지만, 흥덕왕 사후 왕위쟁탈전에 김충공의 이름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 점, 그의 아들인 명(明)이 대신 시중에 임명되어 왕위쟁탈전에 뛰어든 점을 고려하면 충공은 835년경 사망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1974, 이기백)

한편『삼국사기』권10 신라본기10 헌덕왕 13년조(821)에는 “여름 4월 시중 김충공(金忠恭)이 죽었으므로 이찬 영공(永恭)을 시중으로 삼았다(十三年 夏四月 侍中金忠恭卒 伊?永恭爲侍中)”는 기록이 보이는데, 여기에 따르면 김충공은 이미 821년에 사망한 것이 된다. 그러나 바로 이듬해인 헌덕왕 14년조(822)에 충공이 김헌창의 반란 진압에 참여하는 내용이 있으며,『삼국사기』권45 열전5 녹진조를 보면 “헌덕왕 14년(822)에 ···각간 충공(忠恭) 이 상대등(上大等)이 되어 정사당(政事堂) 에 앉아 내외 관원을 주의(注擬)하였다(十四年 ···時忠恭角干爲上大等 坐政事堂 注擬內外官)”는 기록이 보이므로 헌덕왕 13년의 기록은 잘못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서는 시중 김충공이 821년 봄에 있었던 흉년의 책임을 지고 물러난 것을 잘못 기록하였다는 견해가 있다.(이기백, 1974)

결국 충공의 사망에 의해 흥덕왕 사후 김충공-김명으로 이어질 수 있었던 인겸계의 왕위계승권은 예영계의 균정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충공의 아들인 김명은 이러한 상황에 대해 불만을 가지게 되었으며 여기에 더하여 흥덕왕이 후사에 대한 명확한 언급없이 사망함으로써 예영계와 인겸태자계간의 왕위계승분쟁이 촉발되었다. 김명은 우선 예영계 내에서 균정과 대립하고 있던 균정의 조카 제륭을 후원하여 균정을 제거하고 제륭을 왕위에 즉위시켰는데 이가 제43대 희강왕이다. 희강왕 3년(838) 김명이 희강왕에게 반란을 일으키자 희강왕은 자결하였고 결국 김명은 왕위에 올랐으니 이가 제44대 민애왕이다. 민애왕은 왕위에 오른 후에 아버지인 충공을 선강대왕(宣康大王)으로 추증하였다.

최치원이 지은「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비(鳳巖寺智證大師寂照塔)」를 보면 “흥덕대왕이 대업을 계승하고 선강태자가 감무를 하게됨에 사악한 무리를 제거하여 나라를 구제하며 선을 좋아하여 집안을 살찌게 했다.(及興德大王纂戎 宣康太子監撫 去邪?國의 樂善肥家)”하였는데 충공각간을 선강태자라고 한 것을 보면 당시 사람들에게 흥덕왕의 후계자로 간주되어 개혁 정치를 주도하였음을 알 수 있다.(이기동, 1997)

참고문헌

이기백, 1974,『新羅政治社會史硏究』, 일조각.
윤병희, 1982,「新羅 下代均貞系의 王位繼承과 金陽」『歷史學報』96.
이기동, 1997,『新羅社會史硏究』, 일조각.
김창겸, 2003,『新羅 下代 王位繼承 硏究』, 경인문화사.
이기동, 2003,『한국사11-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국사편찬위원회.

관련원문 및 해석

第四十一憲德王 [金氏 名彦升 昭聖之母弟 妃貴勝娘 諡皇娥王后 忠恭角干之女 己丑立 理十九年 陵在泉林村北]
제41 헌덕왕 [김씨이며, 이름은 언승이다. 소성왕의 동복동생이다. 왕비는 귀승랑으로 시호는 황아왕후이니 충공각간의 딸이다. 기축년에 즉위하여 19년간 다스렸다. 능은 천림촌의 북쪽에 있다.]

第四十三 僖康王 [金氏 名愷隆 一作悌? 父憲眞角干 諡興聖大王 一作(翌)成 禮英?干子也 母美道夫人 一作深乃夫人 一云巴利夫人 諡順成太后 忠衍大阿干之女也 妃文穆王后 忠孝角干之女 一云重恭角干 丙辰年立 理二年]
제43 희강왕 [성은 김씨이고 이름은 개륭, 혹은 제옹이다. 아버지는 헌진각간이고 시호는 흥성대왕 혹은 익성이라고 하며 예영잡간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미도부인 혹은 심내부인 또은 파리부인이라고 하며 시호는 순성태후로 충연대아간의 딸이다. 비는 문목왕후로 충효각간의 딸이며 혹은 중공각간이라고도 한다. 병진년에 즉위하여 2년간 다스렸다.]

第四十四 閔[一作敏]哀王 [金氏 名明 父忠恭角干 追封宣康大王 母追封惠忠王之女貴巴夫人 諡宣懿皇后 妃无容皇后 永公角干之女 戊午立 至己未正月二十二日崩]
제44 민애왕 [성은 김씨이고 이름은 명이다. 아버지는 충공각간으로 선강대왕으로 추봉되었다. 어머니는 혜충왕의 딸 귀파부인으로 시호를 선의태후로 추봉하였다. 비는 무용황후로 영공각간의 딸이다. 무오년에 즉위하여 기미년 정월 22일에 이르러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