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서현

김서현

분류 문학 > 인물 > 귀족

기본정보

신라 중고기에 활동했던 인물로, 김유신(金庾信)의 아버지이다.
생몰년 : 미상

일반정보

신라 중고기에 활동했던 인물로, 성은 김씨이고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인 구충왕(仇衝王, 구형왕)의 손자이며, 아버지는 김무력(金武力)이다. 아내는 입종갈문왕의 손녀이자 숙흘종(肅訖宗)의 딸인 만명부인(萬明夫人)이다. 만노군(萬弩郡: 충북 진천) 태수 및 양주(良州: 경남 양산) 총관을 역임하였으며, 신라 제26대 진평왕 51년(629) 고구려 낭비성(娘臂城: 충북 청주)을 공격하여 성을 함락시키는 전과를 올렸다. 김유신(金庾信), 김흠순(金欽純) 등 두 아들과 보희(寶姬), 문희(文姬, 文熙) 등 두 딸을 두었다.

전문정보

김서현은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인 구충왕(仇衝王, 구형왕)의 손자이자, 김무력(武力)의 아들이다. 『삼국유사』 권1 기이1 김유신조에는 “무력 이간(伊干)의 아들 서현 각간(角干) 김씨의 장자는 유신이고, 그 동생은 흠순(欽純)이다. 누이동생은 보희(寶姬), 어릴 때 이름은 아해(阿海)이고 그 동생은 문희(文姬), 어릴 때 이름은 아지(阿之)이다.(武力伊干之子 舒玄角干金氏之長子曰庾信 弟曰欽純 ?妹曰寶姬 小名阿海 妹曰文姬 小名阿之)”라고 하여, 서현이 무력의 아들로 김씨이고 지위는 각간이며, 김유신과 김흠순, 보희, 문희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전하고 있다.

그런데 『삼국유사』 권2 기이2 가락국기조에 전하는 용삭(龍朔) 원년(661) 신유 3월 문무왕(文武王)의 영(令)에는 “가야국원군(伽耶國元君)의 9대손 구충왕(仇衝王)이 본국(本國)에 항복할 때에 거느리고 온 아들 세종(世宗)의 아들 솔우공(率友公)의 아들인 서운잡간(庶云?干)의 딸 문명황후(文明皇后)께서 나를 낳은 까닭에 원군(元君)이 나에게 15대 시조가 된다”라고 하여 서현의 이름이 “서운(庶云)”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이에 따르면 서현(서운)의 계보는 구충왕-세종-솔우공(솔지공)-서운으로 이어지는데, 이는 『삼국사기』 신라본기 및 열전 김유신조와 『삼국유사』 권1 기이1 김유신조의 구형왕(구충왕)-무력-서현의 계보와는 다르다. 그런데 『삼국유사』 권2 기이2 가락국기의 세계(世系)에는 세종이 무력의 형으로 되어 있다. 이에 대해서는, 가락국기의 이 계보는 가야 멸망 후 시조 수로묘에 제사를 맡아 지냈던 자를 기록한 것으로, 구충왕(仇衝王, 구형왕)이 죽은 뒤 그 장남인 세종이 뒤를 이었으나 그가 죽고 다시 그 후에 아우인 김무력이 뒤를 이어 솔우공(솔지공)이라고 불려진 것이 아닐까라고 추정한 견해가 있다.(村上四男, 1978) 즉 이는 구충왕(仇衝王, 구형왕)-무력-서현의 계보가 옳다고 보는 입장이며, 현재 학계에서도 일반적으로 구충왕(仇衝王, 구형왕)-무력-서현으로 계보가 이어진다고 이해하고 있다.

한편 『삼국사기』 권41 열전1 김유신 상(上)에서는 “유신비(庾信碑)를 살펴보니 ‘아버지는 소판 김소연(金逍衍)이다’라고 하였는데, 서현이 혹 고친 이름인지, 아니면 소연이 자(字)인지 알 수 없다(按庾信碑云 考蘇判金逍衍 不知舒玄或更名耶 或逍衍是字耶)”라고 기록하였다. 이 기록에 대해서는, “서현”과 “소연”은 그 음이 유사하므로 같은 이름의 다른 표기인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이병도, 1977)

서현의 관등은 『삼국유사』의 가락국기에는 “잡찬(??)”, 『삼국사기』 권6 신라본기6 문무왕 즉위년(661)조, 열전 김유신조의 가계 소개 및 진평왕 51년(629) 낭비성 전투 기록에는 “소판(蘇判)”으로 되어 있다. 잡찬과 소판은 같은 것으로 신라 16관등 중 세 번째 관등에 해당된다. 그러나 『삼국유사』 기이 김유신조에는 “각간(角干)”, 『삼국사기』 권5 신라본기5 태종무열왕 즉위년조에는 “각찬(角?)”으로 기록되어 있다. 각간과 각찬 역시 같은 것으로 신라 16관등 중 첫 번째 관등에 해당된다.

『삼국사기』 권41 열전1 김유신(상)조에는 또한 서현과 그의 부인 만명(萬明)의 만남에 대해서도 기록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서현은 길에서 입종(立宗)의 아들인 숙흘종(肅訖宗)의 딸 만명을 보고 마음에 들어 눈짓으로 꾀어, 중매를 거치지 않고 결합하였다. 서현이 만노군(萬弩郡: 충북 진천) 태수(太守)가 되어 만명과 함께 떠나려 하니, 숙흘종이 그제서 딸이 서현과 야합(野合)한 것을 알고 미워해서 별채에 가두고 사람을 시켜 지키게 하였는데, 갑자기 벼락이 문을 때려 지키던 사람이 정신없는 사이에 만명이 창문으로 빠져나가 서현과 함께 만노군으로 가게 되었다고 한다.

서현과 만명의 혼인에 대해서는, 서현이 아버지 무력때부터 기반을 세운 가문을 왕족의 지위에 올려놓기 위해 진흥왕의 동생인 숙흘종의 딸과 야합했던 것이며, 둘 사이의 혼인설화는 아직도 무열계가 뚜렷한 정치적 지위를 확보하지 못한 근거가 될 것이라고 본 견해가 있다.(신형식, 1986) 또한 이러한 결합이 동족혼(同族婚)제를 유지하고 있던 신라귀족사회에 큰 문제를 불러일으켰고, 신라귀족사회의 폐쇄성을 타파하는데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末松保和, 1964)

서현은 만명과 결혼하여 김유신을 낳았던 진평왕 17년(595) 당시 만노군 태수로 있었다. 이후 진평왕 51년(629) 가을 8월에는 대장군 용춘(龍春), 부장군 유신(庾信) 등과 함께 고구려의 낭비성(娘臂城: 충북 청주 또는 충주)을 공격하여 5천 여명을 참수하는 전공을 세우기도 했다. 또한 『삼국사기』 권41 열전1 김유신(상)조에서는 김유신의 가계를 소개하면서 아버지 서현은 벼슬이 소판(蘇判) 대량주도독(大梁州都督) 안무대량주제군사(安撫大梁州諸軍事)에 이르렀다고 하였고, 『삼국사기』 권43 열전3 김유신 하(下)에서는 서현이 양주총관(良州總管)이 되어 여러 번 백제와 싸워 공을 세웠다고 전하고 있다.

그런데 이 기록에 보이는 서현의 관직명인 도독과 총관은 모두 후대의 명칭으로, 서현이 활약하던 진평왕대에는 “대량주군주(大梁州軍主)”가 정식 명칭이었을 것이라고 한다. 대량주(大梁州, 大良州: 경남 합천)는 대야성(大耶城)이 있던 곳으로 신라 서남방의 군사적 요충지였으며, 이 지역의 책임관을 역임한 서현은 그 군사적 활동을 통해 신라에서의 기반을 닦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시기 서현은 용춘과 결속함으로써 무열왕(김춘추)-유신, 문무왕-인문으로 이어지는 양 가문 결속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신형식, 1986)

서현이 언제 죽었는지는 기록에 전하지 않아 알 수 없다. 그의 아들 김유신과 김흠순은 신라의 통일전쟁에서 크게 활약하였고, 그의 막내딸인 문희는 김춘추와 결혼하여 문명왕후(文明王后)가 되었으며 문무왕을 낳았다.

참고문헌

末松保和, 1964, 『新羅史の諸問題』, 東洋文庫.
이병도, 1977, 『國譯 三國史記』, 을유문화사.
村上四男, 1978, 『朝鮮古代史硏究』, 開明書院.
신형식, 1986, 『韓國古代史의 新硏究』, 일조각.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1 기이1 김유신)
金庾信
<武>力伊干之子 舒玄角干金氏之長子曰庾信 弟曰欽純 ?妹曰寶姬 小名阿海 妹曰文姬 小名阿之 庾信公以眞平王十七年乙卯生 ?精七曜 故背有<七>星文 又多神異 年至十八壬申 修<劍>得術爲國仙 時有白石者 不知其所自來 屬於徒中有年 郞以伐麗<濟>之事 日夜深謀 白石知其謀 告於郞曰 僕請與公密先探於彼 然後圖之何如 郞喜 親率白石夜出行 方憩於峴上 有二女隨郞而行 至骨火川留宿 又有一女忽然而至 公與三娘子喜話之時 娘等以美菓?之 郞受而啖之 心諾相許 乃說其情 娘等告云 公之所言已聞命矣 願公謝白石 而共入林中 更陳情實 乃與俱入 娘等便現神形曰 我等奈林穴禮骨火等三所護國之神 今敵國之人誘郞引之 郞不知而進途 我欲留郞而至此矣 言訖而隱 公聞之驚? 再拜而出 宿於骨火? 謂白石曰 今歸他國忘其要文 請與爾還家取來 遂與還至家 拷縛白石 而問其情 曰 我本高麗人[古本云百濟 誤矣 楸南乃高麗之士 又逆行陰陽亦是寶藏王事] 我國群臣曰 新羅庾信是我國卜筮之士楸南也[古本作春南 誤矣] 國界有逆流之水[或云雄雌 尤反覆之事] 使其卜之 奏曰 大王夫人逆行陰陽之道 其瑞如此 大王驚怪 而王妃大怒 謂是妖狐之語 告於王 更以他事驗問之 失言則加重刑 乃以一鼠藏於合中 問是何物 其人奏曰 是必鼠 其命有八 乃以謂失言 將加斬罪 其人誓曰 吾死之後 願爲大將 必滅高麗矣 卽斬之 剖鼠腹而視之 其命有七 於是知前言有中 其日夜大王夢 楸南入于新羅舒玄公夫人之懷 以告於群臣 皆曰 楸南誓心而死 是其果然 故遣我至此謀之爾 公乃刑白石 備百味祀三神 皆現身受奠 金氏宗財買夫人死 葬於靑淵上谷 因名財買谷 每年春月 一宗士女會宴於其谷之南澗 于時百卉敷榮 松花滿洞府林 谷口架築爲庵 因名松花房 傳爲願刹 至五十四景明王 追封公爲興<武>大王 陵在西山毛只寺之北東向走峰
김유신(金庾信)
무력(武力) 이간(伊干)의 아들 서현(舒玄) 각간(角干) 김씨의 장자(長子)는 유신(庾信)이고, 그 동생은 흠순(欽純)이다. 누이동생은 보희(寶姬), 어릴 때 이름은 아해(阿海)이고 그 동생은 문희(文姬), 어릴 때 이름은 아지(阿之)이다. 유신공은 진평왕 17년(595) 을묘에 태어났는데, 칠요(七曜)의 정기를 타고 났으므로, 등에 칠성(七星)의 무늬가 있었고 또 신이한 일이 많았다. 나이가 18세 되던 임신년(612)에 검술을 익혀 국선(國仙)이 되었다. 이 때 백석(白石)이란 자가 있었는데, 어디서 왔는지는 알 수 없으나 낭도의 무리에 여러 해 동안 속해 있었다. 유신랑은 고구려와 백제를 치는 일로 밤낮 깊이 모의하고 있었는데, 백석이 그 모의를 알고 낭에게 고해 이르기를, “제가 청컨대 공과 더불어 몰래 먼저 저쪽을 탐색하고, 그 이후에 도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낭은 기뻐하며 친히 백석을 데리고 밤에 떠났다. 바야흐로 고개 위에서 쉬려고 할 때, 두 여자가 낭을 따라 갔다. 골화천(骨火川)에 이르러 유숙하는데, 또 한 여자가 홀연히 이르렀다. 공이 세 낭자와 더불어 기쁘게 이야기 할 때 낭자들이 맛있는 과일을 드리니 낭이 받아먹었고, 마음으로 서로 허락하고 그 실정을 이야기하였다. 낭자들이 고하기를, “공이 말씀하는 바는 이미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원컨대 공이 백석을 물리고 함께 숲 속으로 들어가면 다시 실정을 아뢰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함께 들어갔다. 낭자들이 곧 신의 모습으로 나타나 말하기를, “우리들은 나림(奈林)?혈례(穴禮)·골화(骨火) 등 세 곳의 호국신(護國神)입니다. 지금 적국의 사람이 낭을 꾀어 유인하는데도 낭은 알지 못하고 길을 나아가니, 내가 낭을 만류하려고 여기에 이른 것입니다”라고 하고는 말을 마치고 사라졌다. 공이 듣고 놀라 쓰러지며 두 번 절하고 나왔다. 골화관(骨火?)에 유숙할 때 백석에게 일러 말하길, “지금 타국에 가면서 긴요한 문서를 잊었으니, 청컨대 너와 함께 집에 돌아가서 가져와야하겠다”라고 하였다. 드디어 함께 돌아와 집에 이르러서 백석을 결박하고 그 사정을 물었다. 이르기를 “나는 본래 고구려 사람이다[고본(古本)에는 백제라고 하였으나 잘못이다. 추남(楸南)은 고려의 선비이고 음양(陰陽)을 역행(逆行)한 것도 보장왕(寶藏王)때의 일이다]. 우리나라 군신들이 이르길, ‘신라의 유신은 우리나라에서 점치던 선비 추남이다[고본에서는 춘남(春男)이라고 하였다]. 나라의 경계에 역류하는 물[혹은 웅자(雄雌)가 엎치락뒷치락 하는 일이라고 한다]이 있어서 그에게 점을 치게 했더니 아뢰기를 ‘대왕의 부인이 음양의 도를 역행했으니, 그 단서가 이와 같습니다’라고 하였다. 대왕이 놀라고 괴이하게 여겼다. 왕비가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이는 요망한 여우의 말이다’라고 하고는 왕에게 고하여 다시 다른 일로써 시험하여 물어보게 하고 잘못 말하면 중형을 가하도록 하였다. 이에 쥐 한 마리를 함 속에 넣고 이것이 무슨 물건이냐고 물었다. 그 사람이 아뢰기를 ‘이는 반드시 쥐입니다. 그 목숨은 여덟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잘못 말하였다고 하고는 장차 참죄(斬罪)를 가하려고 하였다. 그 사람이 맹세하여 말하길, ‘내가 죽은 후에 원컨대 대장이 되어 반드시 고려를 멸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곧 베어 죽이고, 쥐의 배를 갈라 보니, 그 목숨이 일곱이었다. 이때 앞서 한 말이 맞은 것을 알았다. 그날 밤에 대왕이 꿈을 꾸었는데 추남이 신라 서현공 부인의 품으로 들어갔다. 이를 군신에게 말하였더니 모두 말하기를 ‘추남이 마음으로 맹세하고 죽었으니 이것이 과연 그러합니다’라고 하였다. 그 까닭에 나를 보내어 이러한 모의를 하게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공이 이에 백석을 처형하고 온갖 음식을 갖추어 삼신(三神)에게 제사지내니, 모두 현신하여 제사를 받았다. 김씨 집안 재매부인(財買夫人)이 죽자 청연(靑淵) 상곡(上谷)에 장사지내고 인하여 재매곡이라 이름하였다. 매년 봄에 온 집안의 사녀(士女)가 그 계곡의 남쪽 시내에 모여 연회를 베풀었는데, 이때 온갖 꽃이 피고 송화(松花)가 마을 숲에 가득하였다. 계곡 입구에 암자를 짓고 인하여 송화방(松花房)이라 이름하였으며, 전하여 원찰로 삼았다. 제54대 경명왕대에 이르러 공을 추봉하여 흥무대왕(興武大王)이라 하였다. 능은 서산(西山) 모지사(毛只寺)의 북쪽 동으로 뻗은 봉우리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