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지

양지

분류 문학 > 인물 > 승려

기본정보

삼국말에서 통일신라초에 활동하였던 승려이자 유명한 조각가
생몰년 : 미상

일반정보

삼국말에서 통일신라초에 활동하였던 승려이자 유명한 조각가로서, 영묘사(靈廟寺) 장륙삼존(丈六三尊)과 천왕상(天王像) 및 전탑(殿塔)의 기와, 천왕사탑(天王寺塔) 아래의 팔부신중(八部神將), 법림사(法林寺)의 주불삼존(主佛三尊)과 좌우(左右) 금강신(金剛神)이 그의 작품이라고 한다

전문정보

양지(良志)는 삼국말에서 통일신라초에 활동하였던 승려이자 유명한 조각가로서, 『삼국유사』 권4 의해5 양지사석(良志使錫)조에 의하면, 영묘사(靈廟寺) 장륙삼존(丈六三尊)과 천왕상(天王像) 및 전탑(殿塔)의 기와, 천왕사탑(天王寺塔) 아래의 팔부신장(八部神將), 법림사(法林寺)의 주불삼존(主佛三尊)과 좌우(左右) 금강신(金剛神)이 그의 작품이라고 한다.

양지의 신분에 대해서는 낮은 신분이었다는 견해와, 비천하지 않았다는 견해가 있다. 곧, 『삼국유사』 권4 의해5 양지사석(良志使錫)조에 의하면, “중 양지(良志)는 그 조상이나 고향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고, 오직 신라 선덕왕(善德王) 때에 자취를 나타냈을 뿐이다.…그는 한편으로 여러 가지 잡예(雜藝)에도 통달해서 신묘함이 비길 데가 없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 중에 조상이나 고향에 대해서 자세히 알 수 없다고 하여 낮은 신분으로 보고 있으며, 여러 가지 잡예(雜藝)에 통달하고 여러 방면의 대가(大家)로서 하찮은 재주만 드러내고 자기 실력은 숨겼다고 하기 때문에 위대한 고승, 참다운 예술가라고 한다.(문명대, 1973) 한편, 조상에 대해 잘 알 수 없다는 기록이나 예능직에 종사했다는 단순한 내용만을 들어 양지(良志)를 비천한 신분으로 보는 것은, 예술가나 불승(佛僧)으로서 그의 진면목을 흐리게 한다는 의견도 있다.(장충식, 1987)

영묘사(靈廟寺) 장륙삼존(丈六三尊)을 만들 때에는 성중(城中)의 남녀가 다투어 진흙을 날랐다는 데서, 양지는 당시 백성들의 존경을 받는 유명한 스님이었음을 알 수 있다.

양지의 국적에 대하여, 젊은 시절에 서역을 오랫동안 여행하거나 아니면 그곳에서 불교미술에 대한 수련을 쌓은 인물일 가능성이 짙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장충식, 1987) 양지를 아예 서역인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양지가 있었다는 석장사(錫杖寺)는 경북 경주시 석장동에 있으며, 1986년 동국대 경주캠퍼스에 의해 발굴되었는데, 출토된 금동불상, 탑상문전, 소상, 명문전 등 유물의 특징이 주로 서역풍이라는 점과 통일신라 이후의 양식을 보이고 있다는 점을 통해, 양지가 서역인이었고 그 활동시기는 통일기 이후라고 한다.(강우방, 1991) 이에 대하여 양지의 작품에 표현된 양식적 특징으로 보아 인도나 서역 양식보다 중국 당나라 양식의 영향이 농후하므로, 설사 유학했더라도 중국에 유학했을 가능성이 더 많은 신라인으로 보기도 한다.(문명대, 2001)

양지의 활동 시기에 대해서도 선덕여왕 때부터 통일신라 초기로 보는 견해와(문명대, 1973), 통일초 문무왕에서 신문왕대에 걸쳐 활동한 것으로 보는 견해(강우방, 1991), 선덕왕대로부터 문무왕대까지 보는 견해가 있다.(신종원, 1992)

참고문헌

문명대, 1973, 「良志와 그의 작품론」『佛敎美術』1.
장충식, 1987, 「錫杖寺址 출토유물과 釋良志의 조각 유풍」『新羅文化』3?4合.
강우방, 1991, 「新良志論-양지의 활동기와 작품세계-」『美術資料』4.
신종원, 1992, 「三國遺事「良志使錫」條 註釋」『古文化』 40?41合.
문명대, 2001, 「신라 大彫刻匠 良志論에 대한 새로운 해석」『美術史學硏究』232.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1 기이1 선덕왕지기삼사)
善德王知幾三事
第二十七德曼[一作萬] 諡善德女大王 姓金氏 父眞平王 以貞觀六年壬辰卽位 御國十六年 凡知幾有三事 初唐太宗送畵牧丹三色紅紫白 以其實三升 王見畵花曰 此花定無香 仍命種於庭待其開落 果如其言 二於靈廟寺玉門池 冬月衆蛙集鳴三四日 國人怪之問於王 王急命角干閼川弼呑等 鍊精兵二千人 速去西郊 問女根谷 必有賊兵 掩取殺之 二角干旣受命 各率千人 問西郊 富山下果有女根谷 百濟兵五百人 來藏於彼 ?取殺之 百濟將軍于召者 藏於南山嶺石上 又圍而射之? 又有後兵一千二百人來 亦擊而殺之 一無孑遺 三王無恙時謂群臣曰 朕死於<某>年某月日 葬我於?利天中 群臣罔知其處 奏云 何所 王曰 狼山南也 至其月日 王果崩 群臣葬於狼山之陽 後十餘年 文<武>大王創四天王寺於王墳之下 佛經云 四天王天之上有?利天 乃知大王之靈聖也 當時群臣啓於王曰 何知花蛙二事之然乎 王曰 畵花而無蝶 知其無香 斯乃唐帝欺寡人之無?也 蛙有怒形 兵士之像 玉門者女根也 女爲陰也 其色白 白西方也 故知兵在西方 男根入於女根則必死矣 以是知其易捉 於是群臣皆服其聖智 送花三色者 盖知新羅有三女王而然耶 謂善德眞德眞聖是也 唐帝以有懸解之明 善德之創靈廟寺 具載良志師傳詳之 別記云 是王代 鍊石築瞻星臺
선덕여왕이 세 가지 일을 미리 알다
제27대 덕만(德曼)[혹은 만(萬)으로 쓰기도 함]의 시호는 선덕여대왕으로 성은 김씨이고, 아버지는 진평왕(眞平王)이다. 정관 6년 임진(632)에 즉위하여 나라를 다스린지 16년 동안에 무릇 미리 안 일이 세 가지가 있었다. 첫째는 당태종이 붉은색, 자주색, 흰색의 세 가지색으로 그린 모란과 그 꽃씨 석되를 보내왔다. 왕은 그림의 꽃을 보고 말하기를, “이 꽃은 필시 향기가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씨를 뜰에 심도록 명령하고 그 꽃이 피고 지는 것을 기다렸는데, 과연 그 말과 같았다. 둘째는 영묘사(靈廟寺) 옥문지(玉門池)에 겨울인데도 여러 개구리가 모여 사나흘 동안 울었다. 나라사람들이 이것을 괴이하게 여겨 왕에게 물었다. 왕은 급히 각간 알천(閼川)과 필탄(弼呑) 등을 시켜 정병(精兵) 2천명을 뽑아서 급히 서교(西郊)로 가서 여근곡(女根谷)을 탐문하면 반드시 적병이 있을 것이니 잡아 죽이라고 했다. 두 각간이 명을 받고 각각 천 명씩을 이끌고 서교(西郊)로 나가 물었다. 과연 부산(富山) 아래 여근곡이 있고 백제 병사 5백명이 와서 그곳에 매복해 있었으므로, 모두 잡아서 죽였다. 백제 장군 우소(于召)라는 자가 남산령(南山嶺) 바위 위에 숨어 있으므로 이를 포위하여 쏘아 죽였다. 또 후속병력 1천 2백 명이 있었는데, 이를 쳐서 한 명도 남기지 않고 다 죽였다. 셋째는 왕이 병을 앓지 않을 때 여러 신하에게 이르기를, “내가 아무 해 아무 달 아무 날에 죽을 것이니, 나를 도리천(?利天) 가운데에 장사지내라”고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그곳을 알지 못하여 “어느 곳입니까?”라고 물었다. 왕이 말하기를 “낭산(狼山)의 남쪽이다.”라고 하였다. 그 달 그 날에 이르러 왕이 과연 세상을 떠나니 여러 신하들이 낭산 남쪽 사지냈다. 10여 년 후에 문무대왕(文武大王)이 왕의 무덤 아래에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세웠다. 불경에는 “사천왕천 위에 도리천이 있다”고 했으니, 이에 대왕의 신령스럽고 성스러움을 알게 되었다. 당시 여러 신하들이 왕에게 아뢰기를, “모란꽃과 개구리가 우는 두 가지 일이 어떻게 그렇게 될 줄 아셨습니까?” 라고 하니 왕이 말하기를, “꽃을 그렸는데도 나비가 없었으므로 그 꽃이 향기가 없음을 알았다. 이는 당 황제가 나의 배우자가 없음을 빗댄 것이다. 개구리의 노한 형상은 병사의 형상이며 옥문이란 여자의 생식기이다. 여자는 음이 되니, 그 음의 색은 흰색이고 흰색은 서쪽이다. 그러므로 군사가 서쪽에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남근이 여근에 들어가면 반드시 죽게 되니 이로써 쉽게 잡을 줄 알았다.” 라고 하였다. 이에 여러 신하들은 모두 그 뛰어난 지혜에 감복하였다. 꽃을 세 가지 색으로 보낸 것은 아마 신라에 세 여왕이 있음을 알고 그러한 것인가. 선덕(善德)?진덕(眞德)?진성(眞聖)을 말함이니 당나라 황제도 헤아려 알아 맞추는 명석함이 있었다. 선덕왕이 영묘사를 창건한 것은 『양지사전』에 자세하게 실려있다. 『별기』에는 “선덕여왕 때에 돌을 다듬어 첨성대(瞻星臺)를 쌓았다”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