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충(고려)

왕충(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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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 이름은 충이고, 자는 천은(天隱)이며, 성은 왕씨(王氏)로, 개주(開州) 사람이다. 7대조인 만세 영해공(萬歲 寧海公)은 우리 태조의 당제(堂弟)이다. 증조 형유(逈猷)는 상사봉어(尙舍奉御)이고, 조부 채(蔡)는 위위주부(衛尉注簿)에 추봉(追封)되었으며, 아버지 이민(里民)은 상□봉어(尙□奉御)에 추봉(追封)되었다. 외조 김준양(金俊陽)은 개주병정(開州兵正)이다. 공은 가슴에 품은 생각을 거리낌없이 바르게 말하였고, 기운과 생김새가 뛰어났다. 처음 시중(侍中) 김공(金公)이 개주의 수령이 되어 나갔을 때, 공이 범상하지 않은 것을 보고 공부할 것을 권하였다. 좌주(座主) 유재(劉載) 아래에서 성균시(成均試)에 합격하고, 지공거(知貢擧) 임의(任懿)와 동지공거(同知貢擧) 박경인(朴景仁) 아래에서 동진사(同進士)에 급제하니, 관례에 따라 양온승동정(良?丞同正)을 더해주었다. 요(太遼) 천경(天慶) 2년(예종 7, 1112)에 진양사록 겸 장서기(晋陽司錄兼掌書記)가 되어 나가고, 임기가 차자 8년(예종 13, 1118)에는 제안부녹사(齊安府錄事)가 되었다. 대원부전첨 국자박사(大原府典籤 國子博士)로 옮기고, 임시로 찰원(察院)으로 들어갔다가 보성군(寶城郡)의 수령이 되어 나갔다. 이에 앞서 호랑이 떼가 경내에 들어와 사람과 동물들을 해치자 백성들이 모두 고통스러워하였는데, 공이 군(郡)에 이르러 함정을 설치하여 다 잡았으므로 지금까지도 그 일을 칭송하고 있다. 그 해 중간에 진양통판(晋陽通判)으로 옮겼는데, 마침 해적 800여 명이 거제군(巨濟郡) 경계에 진을 치고 제멋대로 날뛰면서 사람을 죽이고 재물을 빼앗으니 온 지방이 시끄러웠다. 안찰사(按察使) 이중(李仲)과 선무사(宣撫使) 정응문(鄭應文) 등이 가서 설득하였지만, 그들은 어리석게도 끝내 미쳐 날뛰면서 고슴도치와 매미 떼처럼 무기를 들고 왕명에 항거하였다. 공이 참지 못하고 의(義)를 보고 용기를 내어 혼자 말에 올라 적진으로 달려 들어갔다. 적의 장막 안에 머물면서 며칠 동안 화(禍)와 복(福)으로 깨우치자, 힘들고 피곤한 무리들이 모여 듣고 풀이 바람에 눕듯이 따라왔다. 마침내 이들을 변방의 북쪽으로 나누어 보내니, 이로부터 온 경내가 다시 조용하게 되었다. …
• 출처 : 김용선, 『高慮墓誌銘集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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