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방경(고려)

김방경(고려)

분류 교통/통신/지리 > 해양문화사전 > 해양사 > 인물

… 나라가 경오년(원종 11, 1270)이 되자 강도(江都, 江華)에서 다시 송경(松京, 開京)으로 나왔는데, 불충한 무리들이 난을 모의하여 남쪽으로 내려갔다〈三別抄의 난〉. 공이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로서 추토사(追討使)가 되어 군사를 거느리고 적을 진도(珍島)에서 포위하니, 이듬해 5월까지 무릇 15번이나 크게 싸워 적을 꺾었다. 드디어 금자광록대부 수대위 중서시랑평장사 판이부사 태자태보(金紫光祿大夫守大尉中書侍郞平章事判吏部事大子大保)가 되었다가 곧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로 임명된 것은 이 전쟁에서의 공로 때문이었다. 그물을 빠져 나간 나머지 무리들이 탐라(耽羅)에 들어가 험한 것을 믿고 독한 짓을 자행하자, 다시 공을 행영중군병마원수(行營中軍兵馬元帥)로 삼았다. 계유년(원종 14, 1273) 4월 28일에 배를 타고 대양을 건너가 벌 떼 같이 모여있는 소굴을 모두 깨끗하게 쓸어내니, 큰 산이 계란을 누르는 듯하여 삼한(三韓)이 모두 애오라지 살기를 바라게 되었다. 원종(元宗)이 침전으로 불러들여 정성스럽게 연회를 베풀고 위로하면서 수대사 개부의동삼사 문하시중 상주국 판어사대사(守大師 開府儀同三司 門下侍中 上柱國 判御史臺事)로 임명하였다. 그 해에 선제(先帝, 元 世祖)가 조칙을 내려 (원에) 조회하게 하자, (황제가) 광한전(廣寒殿)에 행차하여 공을 승상의 반열에 앉히고 연회를 크게 베풀어서 손수 상 위의 진미를 집어주었다. 이어 금부(金符)와 금으로 장식한 안장과 백은(白銀) 덩어리[鋌] 등의 많은 예물을 상으로 내렸는데, 보고 들은 천하 사람들이 부러워하지 않음이 없었고, 삼한(三韓)에 인재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에 또 일본(日本)을 정벌하라는 명[東征之命]을 받들어 갑술년(충렬 즉위, 1274)에 일본으로 들어가 토벌하니, 사로잡고 베어 죽인 자가 매우 많았다. … 신사년(충렬 7, 1281) 여름에 다시 일본을 정벌하였으나, 남송군(南宋軍)이 약속보다 석 달 뒤에 왔으므로 이로 말미암아 지체되어 배가 상하고 돌림병이 일어났다. 상국(上國, 元)의 여러 장수들이 매번 군사를 돌이키자고 꾀었으나, 공은 힘써 불가하다고 쟁론하고 여러 차례 싸운 뒤에야 돌아왔다. …
• 출처 : 김용선, 『高麗墓誌銘集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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