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탈해(신라)

석탈해(신라)

분류 교통/통신/지리 > 해양문화사전 > 해양사 > 인물

성은 석씨(昔氏). 토해(吐解)라고도 한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용성국왕(龍城國王) 함달파(含達婆)와 적녀국(積女國) 여왕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하며, 『삼국사기』에 따르면 왜국(倭國)의 동북쪽으로 1,000리 떨어진 다파나국(多婆那國)의 왕과 여국왕(女國王)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비(妃)는 아효부인(阿孝夫人)이다. 알로 태어나 부왕에게 버림을 받고 궤짝에 넣어져 바다에서 표류하다가 아진포(阿珍浦)에 이르러 한 노파에 의해 건져져 양육되었다. 학문과 지리에 두루 통달하여 호공(瓠公)의 집터가 길지(吉地)임을 알고 꾀를 써서 그 집을 차지했다. 8년(남해차차웅 5)에 왕의 사위가 되었으며, 10년에는 대보(大輔)에 올라 정사를 맡아보았다. 57년 선왕(남해차차웅)의 뜻을 받든 유리이사금의 유언에 따라 왕위에 올랐다. 58년 호공을 대보로 삼았으며 이듬해 왜국과 친교를 맺고 사신을 교환했다. 64년 백제가 와산성(蛙山城)과 구양성(狗壤城)을 공격해오자 기병 3,000명으로 격퇴했다. 65년 시림(始林)에서 김알지(金閼智)를 얻어 시림을 계림(鷄林)으로 고치고 이를 국호로 삼았다. 67년 박씨(朴氏)의 귀척(貴戚)에게 주군(州郡)을 나누어주고 그들을 주주(州主)·군주(郡?라고 칭했으며, 순정(順貞)을 이벌찬(伊伐飡)으로 삼았다. 77년 황산진(黃山津)에서 가야군과 싸웠다. 죽은 뒤 성의 북쪽 양정(壤井) 언덕에 묻혔으며 토함산신(吐含山神)으로 추앙되었다고 한다. 탈해가 호공에게서 집을 빼앗을 때 자신이 본래 야장(冶匠)이었다고 주장한 점을 근거로 하여 석씨부족이 철기문화를 가지고 있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한 군사력이 왕위계승에까지 연결되는 강점으로 작용했을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연관목차

1077/2347
석탈해(신라) 지금 읽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