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자식고인돌

탁자식고인돌

[ 卓子式支石墓 , 北方式支石墓 ]

탁자식고인돌(北方式支石墓). 나주 봉황 만봉리

탁자식고인돌(北方式支石墓). 나주 봉황 만봉리

해방전에 일인학자들이 한반도 북부지역을 중심으로 나타나는 분포양상을 근거로 하여 분류한 고인돌 형식으로, 기반식고인돌(南方式支石墓)과 대조를 이룬다. 형태상으로는 지상에 4개의 판석형(板石型) 고임돌(支石)을 세워서 장방형(長方形)의 무덤칸을 구성하고, 그 위에 거대하고 편평한 덮개돌(上石)을 올려 놓은 탁자식(北方式)고인돌을 일컫는다.

이러한 형식은 최근에 중국 요동(遼東)지방에도 수십 여 기 이상 분포하는 것이 확인되었다. 또한 북한지방에서는 이 형식말고도 지하에 매장시설이 있고, 덮개돌만 지상에 노출되어 있는 개석식(無支石式)도 널리 분포하는 것이 확인되어, ‘북방식고인돌’이라는 개념에 일정한 한계가 있음이 인정된다.

한반도 내에서 탁자식고인돌은 주로 한강 이북에 분포하고 있으며, 평안남도와 황해도 지방의 대동강, 재령강, 황주천 일대에 집중되어 있다. 평안남도 용강군 석천산(石泉山) 일대에는 동~서 2㎞, 남~북 3㎞의 면적 안에 무려 120여 기가 밀집되어 있다. 강원지역 산악지대에는 고성과 춘천을 연결하는 북한강 유역을 한계로 탁자식고인돌의 분포가 끝난다. 서해안 지대에는 전라북도 고창에까지 이르고 있으나, 수원-용인을 연결하는 선 이남에는 거의 없다.

덮개돌 크기는 대개의 경우 2.0~4.0m 정도가 보통이나, 황해도 은율 운산리(雲山里)나 오덕리(五德里)에서처럼 8.0m 이상이고, 전체높이가 2.0m 이상인 경우도 있다. 지상에 노출되어 있는 무덤칸의 긴 변에 세운 2개의 고임돌은 거대한 덮개돌의 무게를 직접 받고 있으므로 두꺼운 판돌(板石)을 사용하고 있으며, 하부는 땅속에 깊이 묻혀 무덤칸 내부 바닥보다 훨씬 뿌리가 깊다. 또한 밑뿌리 형태는 되도록 지하에 깊이 박을 수 있도록 삼각형이나 반달형을 이루고 있다.

무덤칸의 짧은 변에 세우는 막음돌은 긴 변 고임돌 내부에 들어와 네모 모양으로 세워진다. 이 짧은 막음돌들은 덮개돌의 중량을 직접 받고 있지 않기 때문에 입구에 여닫기가 비교적 용이하다. 그러나 탁자식고인돌 중에는 4개의 받침돌 중 1~2개가 없어진 경우도 많다. 무덤칸 내부 바닥에는 자갈이나 판돌을 깐 것도 있으나, 그냥 맨 땅으로 된 것이 보통이다. 고임돌 하부에는 기초를 튼튼히 하기 위해 돌덩이로 보강한 예가 많고, 무덤칸 바깥쪽에 돌을 깐 경우는 거의 없다. 무덤칸은 대개 하나로 구성되어 있으나, 황주군 송신동의 예처럼 남~북 장축의 돌방 안에 3장의 판돌을 동~서 방향으로 세워 4개의 칸을 만들고, 각 칸에 시체를 동~서 방향으로 눕혔던 흔적이 있는 형식도 있다.

최근에 요동반도에서 확인된 탁자식고인돌에 대해서 중국학자들은 3가지 형식으로 분류하였다. 첫째는 盖州市 石棚山 고인돌로 대표되는 石棚山유형으로 덮개돌의 길이는 4.0~5.0m, 높이는 2.0m 정도 되는 것으로 정교하게 축조한 것이다. 덮개돌이 편평하면서 장방형을 이루며, 무덤칸 앞뒤로 길게 나온 형상을 하고 있다. 둘째 형식은 金縣 小關屯 고인돌로 대표되는 小關屯유형으로 덮개돌의 길이는 2.0~3.0m, 높이는 1.3m 내외의 것으로 앞의 형식보다 작은 것이다. 덮개돌은 거의 정방형(正方形)을 이루고 있으며, 무덤칸의 네 벽 바깥으로 거의 비슷하게 나와 있다. 다음 셋째 형식은 岫岩縣 興隆 고인돌로 대표되는데, 덮개돌의 길이는 2.0m, 높이는 1.0m 내외의 것으로 소형이다. 덮개돌과 고임돌 모두 자연화강암을 간단히 가공한 흔적만 있다.

탁자식고인돌은 무덤칸이 지상에 노출되어 일찍이 도굴당했을 가능성이 커 부장품이 거의 발견되지 않고 있다. 부장품은 대개 화살촉(石鏃)과 돌검(石劍)이다. 황해도 연탄군 오덕리 두무동 4호에서는 한 곳에서만 9점의 화살촉이 나왔다. 이들은 대부분 화살촉 몸의 단면이 마름모꼴을 이룬 슴베화살촉(有莖式石鏃)이다. 그밖에 반달돌칼(半月形石刀), 대팻날도끼, 둥근도끼, 대롱옥(管玉) 및 토기조각이 출토되고 있다.

탁자식고인돌의 편년에 대해서 일치된 의견은 아직 없으나, 거의 청동기시대에 속하는 것으로 이해되며, 하한에 대해서는 북한지구에 철기가 들어오는 늦어도 B.C. 3세기 이전에 소멸된 것으로 보고 있다. 또 그 기원에 대해서 북한학자들은 돌널무덤(石棺墓)의 뚜껑돌(蓋石)이 지상으로 노출되는 개석식의 침촌형(沈村形)고인돌이 되다가, 지하 매장시설까지 지상으로 완전 노출되고, 대형화되면서 탁자식의 오덕리형고인돌이 되었다고 보고 있다.

그 성격에 대해서는 거석숭배(巨石崇拜)의 표현으로서 종교적인 제사기념물로 보는 견해, 원시사회의 씨족 공공활동장소로 보는 견해, 그리고 무덤으로 보는 견해 등이 있다. 그러나 요동지방을 포함하여 여러 고인돌에서 인골과 부장품이 발견되는 예로 미루어 볼 때 주로 무덤의 성격을 가진 것으로 이해되고, 기념물과 집회소의 성격을 겸비한 것으로 보여진다. 무덤의 주인공에 대해서는 그 규모가 크고, 정교하게 축조된 고인돌의 경우, 일정한 영역을 통제할 수 있는 집안의 지배 족장 무덤으로 볼 수 있다.

참고문헌

  • 遼東半島 石棚(遼寧省文物硏究所, 1994년)
  • 조선 서북지방 고인돌에 관한 연구(석광준, 고고민속론문집 7, 1979년)
  • 韓國의 古墳(金元龍, 敎養國史叢書 2, 世宗大王記念事業會,197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