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문사

용문사

[ 龍門寺 ]

요약 경상북도 예천군 용문면(龍門面) 내지리 용문산에 있는 절.
예천 용문사

예천 용문사

종파 대한불교조계종
창건시기 870년(경문왕 10)
창건자 두운
소재지 경상북도 예천군 용문면 용문사길 285-30(내지리 391)

《김룡사본말사지 金龍寺本末寺誌》에 따르면, 신라시대 870년(경문왕 10)에 두운(杜雲)이 절을 창건하였다고 한다. 두운이 이 산의 동구에 이르렀을 때 바위 위에서 용이 영접하였다 하여 절 이름을 용문사라 하였고, 절을 짓기 시작하였을 때 나무둥치 사이에서 무게 16냥의 은병(銀甁)을 캐어 공사비에 충당하였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은 후삼국 정벌 중에 이 절에 머문 적이 있었는데, 훗날 천하를 평정하면 이곳에 큰 절을 일으키겠다는 맹세를 하였다. 그뒤 936년(태조 19)에 칙명으로 이 절을 중건하였고, 매년 150석의 쌀을 하사하였다. 이후 이 절에는 두운의 법맥이 끊이지 않았는데, 특히 영련은 이곳에서 30년 동안 수도하다가 조응(祖膺)에게 법(法)을 전하였고 조응은 제자 자엄(資嚴)과 함께 여러 법당과 승방 등을 건립하였다.

1165년(의종 19)에는 왕의 칙명으로 중수하였으며, 1171년(명종 1) 태자의 태(胎)를 보관한 뒤 절 이름을 창기사(昌期寺)로 바꾸고 축성수법회(祝聖壽法會)를 열어 낮에는 《금광명경 金光明經》을 읽고, 밤에는 관세음보살을 염하는 의식을 항규(恒規)로 삼았다.

이 법회를 끝마친 뒤 다시 선문구산(禪門九山)의 승려 500명을 모아 50일 담선회(談禪會)를 열었다. 그때 단속사(斷俗寺)의 선승 효돈(孝惇)이 《전등록 傳燈錄》 《능엄경》 《인악집 仁岳集》 《설두집 雪竇集》 《염송》 등을 강(講)하였다. 1173년 나라에 내란이 일어나자 3만 승재(僧齋)를 열고 1180∼1182년에 대법회를 열었는데, 개태사(開泰寺)의 국통 전치(顚緇)가 강을 맡았다.

1478년(성종 9) 소헌왕비(昭憲王妃)의 태실(胎室)을 봉안하고 1480년 정희왕후(貞熹王后)가 중수하여 성불산 용문사라 하였으나, 1783년(정조 7) 문효(文孝) 세자의 태실을 봉안하고는 다시 소백산 용문사로 고쳤다. 1835년(헌종 1) 불이 나서 폐허화된 것을 열파(悅坡)·상민(尙敏)·부열(富悅) 등의 여러 승려들이 힘을 모아 1840년대에 공사를 마쳤다.

이 절에는 세 가지 이적이 있었는데, 첫째는 두운의 창건 때 용이 영접한 일이고, 둘째는 은병을 캐어 절을 공사비에 충당한 일이며, 셋째는 절의 남쪽에 9층 청석탑(靑石塔)을 세우고 사리를 봉안할 때 4층탑 위로 오색구름이 탑 둘레를 돈 일이다.

문화재로는 예천 용문사 대장전과 윤장대(醴泉 龍門寺 大藏殿 輪藏臺: 국보 제328호), 예천 용문사 교지(보물 729), 예천 용문사 목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 및 목각탱(木刻幀:보물 989), 용문사 자운루(경북문화재자료 169)가 있으며, 그밖에 현존하는 당우로 진영각(眞影閣), 명부전(冥府殿), 응진전(應眞殿), 회전문(廻轉門), 범종루, 강원, 천불전(千佛殿), 일주문, 요사채, 두운암(杜雲庵)과 1984년 화재로 모두 불탔다가 복원된 보광명전(普光明殿), 응향각(凝香閣), 단하각, 해운루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