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대외관계

고려의 대외관계

한반도의 역사는 중국 대륙의 정치형세와 밀접한 관계를 가졌다. 고려가 건국할 때는 916년 (遼:거란)나라, 5대 10국, 그리고 960년 5대 10국을 통일한 (宋)왕조가 일어났다. 이때 고려는 대외정책으로 친송배요(親宋排遼)를 표방한 북진정책을 썼으므로 세 차례 거란의 침입을 받았다.

962년 광종 때(송나라 태조 3) 송나라와 국교를 맺은 양국간의 관계를 보면 송나라는 북방에 위치한 요나라와 (金:女眞族)나라를 의식하여 정치적·군사적 의도에서 제휴하려고 하였으나, 고려는 송나라의 선진문화 수입에 주목적을 두고 친선관계를 맺었다.

고려와 여진족과의 관계를 보면 숙종 때 만주 하얼빈[哈爾濱] 지방에서 일어난 완엔부[完顔部]의 추장 영가(盈歌)가 여진족을 통합하여 북간도 지방을 통일한 후 우야소[烏雅束]가 함흥(咸興)까지 진출하여 고려군과 충돌하자, 숙종은 임간(林幹)에 이어 윤관(尹瓘)을 파견하여 여진정벌을 단행했으나 모두 실패하였다. 윤관은 별무반(別武班)을 편성, 1107년(예종 2) 윤관과 오연총(吳延寵)이 여진을 토벌하여 9성(城)을 축성하였으나 1년 후 9성을 포기하였다. 그 이유는 여진족이 환부(還附)를 애걸해왔고, 수비의 곤란 및 보수세력의 성장 때문이었다.

그 후 여진족은 1115년 아구타[阿骨打]가 국호를 금(金)이라 하고 1125년(인종 3) 요나라를 멸한 뒤 1126년 금나라는 고려에 사대(事大)의 예를 강요하기에 이르러 당시 집권자 이자겸 등의 주장으로 사대관계를 결정하였다. 이리하여 고려사회는 내분만 격화되어 이자겸의 난, 묘청의 난, 무신의 난 등으로 더욱 혼란하여 나라의 침입을 받아 자주성을 상실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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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송신라후백제발해

그 후 1370년 공민왕 때에 이르러 지용수(池龍壽)와 이성계(李成桂)가 랴오둥[遼東] 지방을 공략하여 랴오양[遼陽]을 점령하였다. 공민왕 때 2차에 걸친 홍건적(紅巾賊)의 침입과 특히 우왕 전후기의 왜구(倭寇)의 침입은 국정을 불안하게 했고 국력을 소모시켰다. 이와 같은 정치적·사회적 불안기에 명나라가 만주를 점령한 뒤 원나라가 지배하였던 쌍성총관부에 철령위(鐵嶺衛)를 설치하자, 이에 분개한 최영(崔瑩)은 우왕에게 품의하여 1388년(우왕 14) 요동정벌을 단행하였다. 이때 우군도통사 이성계는 위화도(威化島)에서 4불가론(不可論)을 내세워 회군을 단행하여 최영을 고양(高陽)으로 귀양보내고, 우왕을 폐위시켜 강화로 추방한 뒤 아들 창(昌)을 즉위시켰는데, 이가 곧 창왕(昌王)이다. 이렇게 하여 정치적·군사적 실권을 장악한 이성계는 새 왕조 조선을 개창할 계기를 마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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