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동성 전투

강동성 전투

[ 江東城 戰鬪 ]

요약 1218년(고려 고종 5) 고려 ·몽골 ·동진(東眞)의 연합군이 고려의 강동성(평양 동쪽)에서 거란[契丹]의 잔적(殘賊)을 쳐부순 싸움.

오랫동안 고려를 침범하여 괴롭혀 왔던 거란을 완전소탕하였다는 데에 의의가 있다. 1218년 9월 거란군이 은주(殷州:殷山)로부터 남하하여 강동성에 입거(入據)하자, 몽골은 원수 합진(哈眞)이 이끄는 1만의 군대와 동진의 장수 완안 자연(完顔子淵)이 이끄는 2만 명의 병력을 연합하여 “거란군을 토멸하고 고려를 구한다”고 성언(聲言)하고 동북면으로 내려와 적의 거성(據城)인 화주(和主:永興) ·맹주(孟州:孟山) ·덕주(德州:德川) ·순주(順州:順川)를 차례로 쳐부수고 적의 주력이 있는 강동성으로 쳐내려왔다.

그러나 때마침 많은 눈이 내려 군량의 보급로가 끊어지자, 강동의 적은 성벽을 굳게 닫고 공격군을 피로하게 하려 하므로 몽골 장수 합진은 서북면원수부(西北面元帥府)에 사람을 보내어 군량을 요구하면서, 거란을 소탕한 뒤에 여 ·몽 양국이 형제의 의를 맺을 것을 약속하는 통첩을 칭기즈칸의 이름으로 전해 왔다. 한편 고려 조정에서는 그들의 참뜻을 의심하여 공동작전을 하는 데 주저하였으나, 다음해인 1219년(고종 6) 권지합문지후(權知閤門祗侯) 윤공취(尹公就) 등이 화의를 맺자는 첩문(諜文)을 가지고 몽골군영에 가고, 몽골에서도 답례의 사자를 보내어 서로 동맹의 뜻을 굳게 하였다. 또한 서북면원수 조충은 십장군병(十將軍兵) ·신기(神騎) ·대각(大角) 및 내상(內廂)의 정병을 거느리고 몽골군과 합세하였다.

강동성의 포위작전에 있어 적의 도피를 막기 위하여 미리 성 주변에 너비 ·깊이 각 10자의 못을 파고 공격하자 적장 등 40여 명이 성을 넘어 연합군에 항복하는 바람에 성 안의 적의 괴수 함사(喊舍:王子)는 목을 매어 자살하였고, 그의 관인(官人) ·장졸(將卒) ·부녀 등 5만여 명이 성문을 열고 나와 항복하였다. 조충은 거란 포로들을 각 도로 보내어 인구가 적고 개간이 덜된 곳에 나누어 집단으로 살게 하면서 농경을 업으로 삼게 하였는데, 이들의 집단구역을 속칭 거란장(契丹場)이라 하였다. 이리하여 시간적으로 전후 3년, 지역적으로는 압록(鴨綠) ·정평(定平) 이남, 죽령(竹嶺) 이북의 지역을 짓밟았던 거란을 강동성에서 큰 희생도 없이 정벌하였는데, 이로써 형성된 양국의 관계는 이후 고려사의 기점이 되었다.

참조항목

거란장, 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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