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화도회군

위화도회군

[ 威化島回軍 ]

요약 고려 말기인 1388년에 요동정벌군의 장수였던 이성계(李成桂), 조민수(曺敏修)가 압록강의 위화도에서 군사를 돌려 정변(政變)을 일으키고 권력을 장악한 사건이다.

원인과 배경

14세기 중반 이후 원(元)나라가 몰락하면서 동아시아의 정치질서에 커다란 변동이 일어났고, 고려도 이러한 국제 정세에 맞추어 국가들과의 관계를 새롭게 모색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1354년(공민왕 3)에 고려는 농민반란으로 궁지에 몰린 원의 요청으로 최영을 장수로 하여 2천여명의 병력을 파견하기도 했으며, 1359년(공민왕 8)과 1361년(공민왕 10)에는 중국 허베이[河北] 지방에서 일어난 농민반란군인 홍건적(紅巾賊)의 침입을 받아 큰 피해를 입기도 하였다. 1368년 주원장(朱元璋)이 난징[南京]에서 명(明)을 건국한 뒤 북벌에 성공해 원나라의 세력을 북쪽으로 몰아낸 뒤에는 명나라로 사신을 보내 친명 반원의 태도를 분명히 하였다. 하지만 공민왕은 1369년과 1370년 두 차례에 걸쳐 요동(遼東) 지역의 동녕부(東寧府)를 공격하며 북진(北進)의 의지를 보이기도 하였고, 명나라는 고려가 요동으로 진출하지 않을까 우려하여 고려에 대한 경계와 압박을 늦추지 않았다. 명나라는 1371년 요양(遼陽)에 요동위(遼東衛)를 설치하여 본격적으로 요동지역으로의 영토 확장을 꾀했다.

당시 요동(遼東)을 점령하고 있던 나하추[納哈出]와 원나라의 잔여 세력은 고려와 우호관계를 유지하여 명나라를 견제하려 했다. 그리고 1374년 공민왕이 죽고 우왕(禑王)이 즉위한 뒤 고려의 새로운 실권자로 떠오른 이인임(李仁任)도 명나라 사신 채빈(蔡斌)의 살해사건 등을 계기로 원나라, 명나라 모두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양단 외교를 추진하며 두 세력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려 했다.

하지만 1387년 나하추가 명나라에 항복하면서 명나라는 고려에 대해 직접 압박을 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388년(우왕 14) 2월에는 과거 원나라 때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가 있었던 철령(鐵嶺) 이북의 땅에 철령위(鐵嶺衛)를 설치하겠다며 그 영토의 반환을 요구해왔다. 이 지역은 1356년(공민왕 5) 고려가 탈환하여 화주목(和州牧)을 설치해 통치하고 있던 곳이었다.

경과

명나라의 무리한 요구에 대해 당시 이인임 일파를 몰아내고 고려 조정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최영(崔瑩)은 명나라가 군사적으로 침략하기 위해 압박하는 것으로 보고 강하게 반발했다. 그래서 명나라의 홍무(洪武) 연호의 사용을 중지했으며, 명나라의 침략에 능동적으로 맞서기 위해 요동에 대한 원정을 준비하였다.

우왕은 서경(西京)에 머무르며 5만 여명의 군사를 징발하여 요동정벌군을 구성하였으며, 최영을 총사령관인 팔도도통사(八道 都統使)로 삼고, 조민수(曺敏修)를 좌군 도통사(左軍 都統使), 이성계(李成桂)를 우군 도통사(右軍 都統使)로 삼았다. 그리고 조민수와 이성계가 원정군을 이끌고 출정케 하였다. 음력 4월 18일에 서경을 떠난 원정군은 19일이 지난 음력 5월 7일에 압록강 하류의 위화도(威化島)에 도착했는데, 그곳에서 압록강의 물이 불어나 강을 건너기 어렵다며 진군을 중단하고 14일을 머물렀다. 그리고 이성계는 조민수와 상의하여 “① 작은 나라로 큰 나라를 거스르는 것은 옳지 않다(以小逆大) ② 여름철에 군사를 동원하는 것은 옳지 않다(夏月發兵) ③ 온 나라의 병사를 동원해 원정을 하면 왜적이 그 허술한 틈을 타서 침범할 염려가 있다(擧國遠征, 倭乘其虛) ④ 무덥고 비가 많이 오는 시기이므로 활의 아교가 풀어지고 병사들도 전염병에 시달릴 염려가 있다(時方暑雨, 弓弩膠解, 大軍疾疫)”는 이른바 ‘4불가론(四不可論)’을 주장하며 요동 정벌을 중단하고 철병(撤兵)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서경에 있던 우왕과 최영은 이를 허락하지 않고 도리어 속히 진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이성계와 조민수는 정변(政變)을 모의하여 음력 5월 22일 회군을 결행하였다. 우왕과 최영은 당황하여 서경을 떠나 수도인 개경으로 급히 돌아가 반격을 준비하였다. 위화도를 떠난 지 9일 만인 음력 6월 1일 이성계와 조민수가 이끈 반란군은 개경 부근까지 진군했으며, 2일 후에는 개경을 함락시키고 우왕과 최영을 사로잡았다.

위화도회군 본문 이미지 1
원고려원고려위화도

결과와 의의

위화도 회군으로 정권을 장악한 이성계와 조민수는 우왕을 폐위시키고 강화도(江華島)로 유배하였으며, 최영은 고봉(高峰, 지금의 경기도 고양)으로 유배하였다가 처형하였다. 그리고 우왕의 아들인 창왕(昌王)을 왕으로 세웠으며, 조민수는 우시중(右侍中), 이성계는 좌시중(左侍中)의 지위에 올랐다.

그 뒤 조정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이성계와 조민수가 대립하였으나, 군사력뿐 아니라 신진사대부들을 기반으로 정치적 기반도 튼튼히 확보하고 있었던 이성계가 승리하였다. 이성계는 1389년(창왕 1) 사전(私田) 개혁을 빌미로 조민수를 유배하였고, 조민수와 이색(李穡)의 추대로 왕위에 오른 창왕을 신돈(辛旽)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며 폐위시키고 공양왕(恭讓王)을 새로 왕으로 세웠다. 이처럼 이성계가 실권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면서 조선(朝鮮) 왕조가 창건되는 기초가 마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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