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유교

대한민국 유교

한국에 유교문화가 도입된 것은 중국과의 교류가 있은 때로부터 시작된다. 고구려의 제천의식인 동맹(東盟)은 중국 춘추시대(春秋時代)의 회맹(會盟)을 방불케 하며, 광개토대왕릉비의 비문이나 고구려 고분벽화에도 유교의 음양사상(陰陽思想)을 나타낸 것들이 있다. 고구려는 372년(소수림왕 2)에 태학(太學)이라는 유교 교육기관을 세우고, 또 전국에 경당(堂)을 두어 오경(五經)과 사·문(史文)을 가르쳐 인재를 길렀다. 백제에서도 오경박사(五經博士)를 둔 것은 일찍부터 유학(儒學)이 인간교육의 지표가 되어왔음을 말한다. 신라에서도 유교의 윤리강령을 널리 중시하여 불교 및 선도(仙道)와 함께 화랑(花郞)들의 생활지침이 되었다. 그 기본은 충(忠)·효(孝)·인(仁)·의(義)·예(禮)·지(智)·신(信)에 있었다. 682년(신문왕 2)에는 유교 교육기관인 국학(國學)이 설립되고, 788년(원성왕 4)에는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를 설치하여 관리를 임용할 때 일정한 유학지식을 터득하도록 요청하였다.

9세기의 최치원(崔致遠)은 유·불·선(儒佛仙) 3교(敎)에 통달한 학자로서, 시무책 10여조(時務策十餘條)를 만들어 국정쇄신을 기하였으며, 원효의 아들 설총(薛聰)도 탁월한 유학자였다. 고려시대에 들어와 유교는 더욱 중시되었는데, 958년(광종 9)부터 실시된 과거제도는 정치이념 속에 유교이념이 짙게 배어 있음을 의미한다. 성종은 최승로(崔承老)의 상소에 따라 연등회(燃燈會)·팔관회(八關會) 등 불교행사를 중지하게 하는 한편 국자감(國子監)을 설치하였고, 인종은 지방에 향학을 설치하였다. 또 최충(崔沖)은 1055년(문종 9)에 사숙(私塾)을 두었는데, 이때 이래로 사숙 12개소가 생기고 그곳의 학도들은 12도(徒)라 하여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원(元)과의 교류과정에서 도입된 주자학(朱子學)은 고려 말기의 학문과 사상에 새로운 전환의 계기를 가져왔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유교는 지배이념으로서의 자리를 굳히고 또 종교적 성격을 뚜렷이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중앙에는 성균관(成均館), 지방에는 향교(鄕校)와 사립(私立)의 서원(書院)이 설치되어 인재양성과 제사가 거기서 이루어졌다. 숭유배불 정책이 정립되기까지는 원으로부터 주자학을 도입한 안향(安珦)과 그 뒤를 이어 주자학을 공부한 이색(李穡)·정몽주(鄭夢周)·이숭인(李崇仁)·정도전(鄭道傳)·권근(權近)·길재(吉再) 등의 공이 크다. 세종은 유교이념에 입각하여 집현전(集賢殿)을 만들고 삼강오륜(三綱五倫)의 중요성을 고취하기도 하였지만, 그의 종교정책은 모든 종교에 관용적인 기본입장을 가진 것으로 그 의의를 높이 평가할 수 있다. 조선시대 주자학의 이론 전개는 중국 유학이 우주론적 관심을 앞세운 데 비해, 인간의 심성문제에 관심을 집중한 사실에서 그 특징을 찾을 수 있다.

서경덕(徐敬德)·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이이(李珥) 등이 그러한 이론을 발전시킴으로써 한국의 유학을 빛냈다. 유교에서는 천(天)이 인간생명의 근원이며 백성을 살피고 있는 주재자(主宰者)이다. 천은 인간에게 내면적 덕성을 부여하였으므로 따라서 인간은 천으로부터 받은 명(命)인 성(性)을 따라야 한다. 이것이 곧 도(道)이고 성(誠)이다. 그러므로 유교는 인간 속에 내재된 성을 천으로까지 닿도록 성을 다해야 한다는 점에서 종교성을 지닌다. 그런데 한 인간은 그 생(生)을 부모로부터 받았고, 그 부모는 다시 조상으로부터 그 생을 받은 것이며, 그 조상은 다시 거슬러 올라가 천으로부터 생명을 부여받았으므로 조상숭배는 단순한 윤리를 넘어 종교적 의미를 가진다. 그리하여 유교의 종교의식은 제사로 집약되었다. 유교의 제사는 천지에 대한 제사와 조상에 대한 제사 및 성현(聖賢)에 대한 제사로 구분되는데, 이를 각각 교사(郊社)·조묘(祖廟)·문묘(文廟)라 한다.

이러한 제사의례는 엄격한 규정을 낳았고, 이로 말미암은 의례의 복잡화와 논의의 형식화는 본래 유교가 중요시했어야 할 심성도야의 실천적 수행을 소홀히 하고 공리공론(空理空論)과 형식적 의례의 관습화만을 촉진시켜, 지배체제의 모순을 해결할 수 있는 사상적 능력을 가지지 못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폐쇄적인 소규모 조직으로 분산되어 있다가 광복 후에 이를 재구성하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김창숙(金昌淑)을 성균관장으로 추대하여 유도회(儒道會)를 설립하고 성균관과 전국 향교를 유교교단으로 조직하는 등 혁신을 위한 노력을 하였지만, 1956년부터 1963년에 걸친 유림의 분규로 유교가 사회의 지도적 기능을 수행하지는 못하였다. 1970년대 이후  '도의선양대회' 개최와  '윤리선언문 및 실천요강'(1973) 발표 등 사회도덕운동을 일으키고 있으며 공자학회(1980)·유교학회(1985)·예학회(1989) 등에서 전문 유교학자들이 활동하고 있다. 1995년의 유교인 수는 21만 명으로, 1983년 78만 6955명에서 크게 줄어들었다. 2005년 당시 유교인 수는 10만 4575명이었다. 하지만 제도 종교로서의 유교 인구와 관계 없이 유교의 사회적 영향력은 상당한 편이라고 볼 수 있다.

카테고리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