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사부

집사부

[ 執事部 ]

요약 신라의 중앙행정관청 13부 가운데 하나로서, 왕의 명령을 집행하고 보고하며 중요한 기밀업무 등을 맡았다.

《삼국사기》에는 진덕왕 5년(651)에 처음 설치되었다고 기록되었지만, 이는 진흥왕 때부터 있던 품주(稟主)를 고친 것이다. 흥덕왕(興德王) 4년(829)에는 집사성(執事省)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집사부의 책임자는 중시(中侍)로서, 정원이 1인이었는데, 이는 병부(兵部)·예부(禮部) 등의 다른 관부의 장관이 대개 2명 이상이었던 것과 다른 점이다. 중시는 진덕왕 5년 집사부가 설치될 때 처음 임명되었으며, 경덕왕 6년(747)에는 명칭이 시중(侍中)으로 바뀌었다. 규정상 신라 17관등 중 제5등 대아찬(大阿湌)부터 제2등 이찬(伊湌)까지 중시에 취임할 수 있었는데, 대개 파진찬(波珍湌)이 임명되었으며, 진골출신의 아찬(阿湌)이 임명된 경우도 있다.

중시 아래에는 전대등(典大等) 2인이 있었다. 전대등은 진흥왕 26년(565)에 처음 임명되었으며, 경덕왕 6년에 시랑(侍郞)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제11등 나마(奈麻)부터 제6등 아찬(阿湌)까지 전대등에 취임할 수 있었다.

대사(大舍)도 2인을 두었다. 진평왕 11년(589)에 설치하였으며, 경덕왕 18년(759)에 낭중(郎中)으로 이름을 고쳤다. 제13등 사지(舍知)부터 제11등 나마까지 취임할 수 있었다.

사지(舍知)도 2인이었다. 신문왕 5년(685)에 처음 설치되었으며, 경덕왕 18년에 원외랑(員外郞)으로 이름을 고쳤다가 혜공왕 12년(776)에 다시 사지로 되돌렸다. 제13등 사지부터 제11등 나마까지 취임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사(史) 14인을 두었는데, 문무왕 때 6명을 더 배치하였다. 경덕왕 때 이름을 낭(郞)으로 바꿨다가 혜공왕 때 다시 사(史)로 되돌렸다. 제17등 선저지(先沮知)-조위(造位)부터 제12등 대사까지 취임할 수 있었다.

집사부는 진덕왕 때 정권을 장악한 김춘추(金春秋)·김유신(金庾信)세력이 화백(和白)회의로 상징되는 귀족세력에 대항하여 왕권의 전제화(專制化)를 이루기 위해 설치했다고 이해하는 것이 보통이다. 따라서 장관인 중시는 왕의 측근으로서 기밀업무와 왕명출납을 맡았으며 명실공히 수상(首相) 관부로서 전제왕권의 방파제 역할을 했다고 설명되어 왔다. 그러나 집사부 업무의 특성상 정치적으로 비중이 크고 중요한 직책이긴 했지만 중시가 수상의 지위에 오르지는 못했으며, 집사부도 수상관부가 아닌 조선시대의 승정원(承政院)과 비슷했다고 보기도 한다.

집사부 본문 이미지 1
집사부병부조부창부예부승부사정부예작부(예작전)선부영객부위화부이방부공장부

참조항목

중시, 품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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