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영공원

육영공원

[ 育英公院 ]

요약 조선 후기 한국 최초의 근대식 공립교육기관으로 근대적 신교육으로 발전하는 교량적 역할을 하였으나, 영어교육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고급 양반 자제만을 대상으로 삼는 등 국민 대중 교육에는 한계가 있었다.
국가 한국
구분 공립교육기관
소재지 서울 전동

강화도조약(1876)의 체결 후, 서양 근대 문명이 대량으로 들어오고 동시에 국내 선각자들도 해외의 선진 문물을 수용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꼈다. 그리하여 정부차원에서도 선진 문물을 도입하기 위해 해외에 사절단을 파견하기도 하였다. 또한 국내에 근대식 교육기관을 설립하여 근대 교육을 실시해야 함을 절감하고 있었는데 그리하여 설립된 최초의 근대식 관립 교육기관이 육영공원(育英公院)이다.

일본과 중국을 돌아보고 1883년 미국에 보빙사(報聘使)로 갔다가 돌아온 민영익(閔泳翊)을 비롯하여 개화파인 홍영식(洪英植), 서광범(徐光範), 변수(邊燧) 등이 국가 근대화를 위해서 근대학교를 설립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 후 갑신정변 등 국내의 정치적 소요로 미루어 오다가, 미국에서 헐버트(H. B. Hulbert)·길모어(G. W. Gilmore)·번커(D. A. Bunker) 등 세 명의 교사가 옴으로써 1886년 9월 23일에 개교하였다. 학교 이름인 육영공원(育英公院)은 ‘(젊은) 영재를 기르는 공립학교’라는 의미이다. 처음에는 서울 정동에 설립하였으나 1891년 전동으로 이전하였다.

학생의 구성은, 현직 관료 가운데 젊은 사람을 선발하여 좌원반(左院班)을 만들고, 양반 자제 가운데 총명한 자를 선발하여 우원반(右院班)으로 하여 두 학급 35명을 두었다. 교수들은 모두 미국인들을 초청하였다. 미국인 교수인 헐버트(H. B. Hulbert)·길모어(G. W. Gilmore)·번커(D. A. Bunker)가 1894년까지 근무하였고, 번커가 사임한 뒤에 영국인 허치슨(W. F. Hutchison)과 핼리팩스(T. E. Hallifax)가 1894년 폐교될 때까지 대신 근무하였다.

학교의 학칙인 계사(啓辭)에 나와 있는 설립목적을 보면, ‘오늘날 여러 나라의 국가간 교제(交際)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어학(語學)이다. 이를 위해 공원(公院)을 설립하여 젊고 총민한 사람을 선발하여 학습하게 한다.’ 라고 되어 있다. 당시 외국과의 접촉에 가장 중요한 학문이 외국어라고 생각하고, 여러 교과 가운데 영어를 가장 중요하게 여겼다. 그 외에 독서(讀書), 습자(習字), 학해자법(學解字法), 산학(算學), 사소습산법(寫所習算法), 지리(地理), 학문법(學文法) 등의 기초 과정을 수료하고, 다음 과정으로 대산법(大算法), 제반학법-제반역학자(諸般學法-諸般易學者), 만물격치(萬物格致), 각국의 언어·역사·정치 등을 학습하였다.

우리 나라 최초의 외국어 학습 기관인 동문학(同文學)이 1883년에 설립되어 영어 통역관을 양성하는 역할을 하였으나, 육영공원이 설립되어 외국어를 중요시하고 영어 학습을 강력히 실시하자, 같은 관립 학교인 동문학의 역할을 대신하게 되어 동문학은 3년 만에 폐쇄되었다.

육영공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학교이긴 하였으나, 지나치게 영어만을 강조하고 외국인 교수만을 채용하는 한편 고급 양반 자제만을 대상으로 하는 등 서민들과는 친숙하지 못하고 국민 대중을 교육하여 계몽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여기에 재정난 등이 겹쳐 설립된 지 불과 8년 만에 폐교되었다(1894).

카테고리

  • > >
  • > > >
  • > > >
  • > >
  • > >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