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머 헐버트

호머 헐버트

[ Homer Bezaleel Hulbert ]

요약 조선 말기와 일제강점기에 국내에서 활동한 미국 감리교 선교사·교육자·언론인·역사연구가. 구한말 조선에 입국해 한글 연구 및 확산에 기여하였고, 고종을 도와 대한제국 말기 국권수호를 적극 도왔으며 일제강점기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양화진외인묘지(헐버트의 묘)

양화진외인묘지(헐버트의 묘)

출생-사망 1863.1.26 ~ 1949.8.5
국적 미국
활동분야 종교, 교육, 한국 근대사 및 한글
출생지 미국 버몬트주 뉴헤이븐
주요저서 《한국사 The History of Korea》, 《사민필지》, 《대한제국 멸망사 The Passing of Korea》
시대 19~20세기

1863년 미국 버몬트주 뉴 헤이븐에서 태어났다. 1884년 다트머스대학교를 졸업하고 유니언신학교에서 2년 간 공부하였다. 1886년 조선에 입국해 최초의 근대식 교육기관인 육영공원에서 영어를 가르쳤다. 수업을 위해 개인교사를 고용해 한글을 배우면서 3년 만에 상당한 한글 실력을 갖추었고, 1889년 한글로 쓰여진 최초의 지리 교과서 《사민필지》를 저술해 교재로 사용하였다.

한글의 우수성과 과학성에 매료돼 미국 언론과 영문 잡지에 기고를 통해 홍보했으며, 《사민필지》 서문에는 당시 지배층이 한글 대신 어려운 한자 사용을 고수하는 관행을 지적하였다. 또한, 구전으로 내려오던 '아리랑'을 서양식 음계로 처음 채보해 알렸다. 1896년 서재필, 주시경 등과 함께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신문인 〈독립신문〉을 발간하였고, 당시 주시경과 함께 국문연구소를 설립하고 한글을 연구하며 띄어쓰기를 도입하였다. 

또한 조선 말기 국권회복운동과 일제강점기 한국의 독립운동에 기여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고종의 특사로서 대한제국의 자주독립을 주장하는 밀서를 미국의 대통령 및 국무장관에 전달하고자 했으나 성사되지는 못했다. 1906년 다시 입국해 영문 월간 잡지 〈한국평론 The Korea Review〉을 창간하고 일본의 조선 침략에 대해 폭로하였다. 또한 고종에게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하도록 건의하였다. 헐버트는 한국 대표단보다 먼저 헤이그에 도착해 《회의시보》에 우리 대표단의 호소문을 싣게 하는 등 한국의 국권회복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1908년 미국에 정착한 후에도 한국에 관한 여러 편의 글을 발표하였고, 1919년 서재필이 주관하는 잡지에 3·1운동을 지지하는 글을 발표하기도 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1949년 국빈으로 초대받아 한국을 방문했으나 일주일 후 병사하였다. 고국보다 한국에 묻히기 원했던 그의 유언에 따라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안장되었다. 1950년 대한민국 정부에서 외국인 최초로 건국공로훈장 태극장을 추서하였고, 2014년에는 한글학자이자 역사연구가로서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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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화진외인묘지

양화진외인묘지 출처: doopedi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