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교육

근대교육

[ 近代敎育 ]

요약 근대국가의 성립 및 자본주의 사회의 발생과 더불어 시작된 교육.
이화학당 정동 한옥교사

이화학당 정동 한옥교사

교육사적(敎育史的) 견지에서 근대교육이라 하면 중세의 봉건적 교육형식 또는 도제식(徒弟式) 교육형식을 거쳐 계몽사조를 기초로 나타난 계몽주의 교육을 말하며, 제도적으로는 공교육(公敎育)체제 또는 의무교육제가 나타난 것으로 18세기의 일이다. 교육학적 논의가 학문적 시야에서 다루어지고, 나아가 국가적 안목에서 교육의 체제를 정비하는 것이 18세기 서양문화사의 특징의 하나이다.

한국의 경우는 근대를 언제로 보느냐에 따라 다소 견해 차이가 있다. 왜냐 하면, 서양에서는 봉건제도의 붕괴와 자본주의의 확대, 계몽사조 및 공교육체제의 정비 등 일련의 요소를 합쳐서 근대라고 볼 때 18세기가 뚜렷하게 근대로 파악되지만, 한국의 경우는 18세기에 그런 특징이 없었고 그 후에도 그와 같은 징후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한국의 근대교육은 1880년대부터 1945년 8 ·15광복까지를 말한다.

1880년대는 한국이 동양의 ‘깊이 잠든 나라’에서 서양 여러 나라와 통상수호조약을 맺음으로써 개화시대로 돌입하는 큰 변화가 전개된 시기이다. 개국(開國)이 되자 무엇보다도 시급한 것은 외국인과의 교섭이었고, 이 교섭에서 언어가 가장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어 외국어교육이 절실하게 되었다. 1883년 묄렌도르프와 T.E.핼리팩스에 의한 영어학교 개교라든지, 1886년 양반학교인 육영공원(育英公院) 개설은 이러한 필요성의 단적인 반영이었다. 육영공원은 영어학교로서 양반의 자제 35명을 수용하였으며, 교사로는 정부가 미국에서 초빙한 미국인 교사 G.W.길모어, D.A.벙커, H.B.헐버트 등 세 사람이었다. 이것이 한국에 세워진 최초의 근대학교이며, 1895년 법에 따라서 근대학교가 세워지기까지는 오랜 예비적 단계가 필요하였다. 그 동안 세워진 것이 배재학당(培材學堂)을 비롯한 경신학교(儆新學校) ·이화학당(梨花學堂) 등의 사립학교로서 주로 그리스도교 선교사에 의해서 설립되었다. 이러한 사학(私學)은 근대학교 성립을 위한 선구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1894년 이후 사학은 종교계 학교가 주종을 이루었지만, 서민출자학교와 양반출자학교도 속출하였다.

1894년 갑오개혁은 교육제도에도 근본적인 개혁을 가져왔다. 과거제도가 폐지되고 문교행정을 담당해 오던 예조(禮曹) 대신에 학무아문(學務衙門)이 생겨, 그 해 7월 학무아문 명의로 고시(告示)하여 영재교육(英才敎育)이 시급한 데 비추어 소학교와 사범학교를 서울에 세울 것임을 알리고, “위로 공경대부의 아들로부터 아래로 범민의 준재까지”누구나 학문하는 혜택을 입을 수 있다는 것을 밝혔으며, 장차는 전문학교 ·대학교도 세울 것이라고 하였다. 이어 1895년 2월 전국민에게 내려진 교육입국조서(敎育立國詔書)는 이것을 재천명한 셈이었다.

그러나 당시 일률적인 학교령(學校令) 같은 것은 없었으며, 단지 관제(官制) 또는 규칙이라고 하는 것에 의하여 관 ·공립학교가 연이어 설립되었다. 1895년 3월 법관양성소, 4월 관립한성사범학교(官立漢城師範學校)가 설립되었으며, 일어 ·영어 ·청어(淸語) 외국어학교가 생겼다. 또 성균관이 개혁되고, 소학교로 수하동(水下洞)소학교 ·장동(壯洞)소학교 ·정동(貞洞)소학교 ·재동소학교가 설립되었다. 이듬해 노어(露語)학교가 설립되었으며, 한어(漢語) 및 독어(獨語)학교가 설립된 것은 이보다 4년 후였는데, 당시는 일본을 비롯하여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러시아 등 여러 열강 세력이 한국에서 암투를 전개하고 있던 때라 각 외국어학교의 성쇠는 곧 한국에 있어서 여러 열강 세력들의 성쇠를 반영하였다. 그 중에서도 정세를 비추어 보아 일어학교가 가장 높은 지망률을 보인 것은 당연한 일이다.

1899년 경성의학교(京城醫學校)를 비롯하여 상공학교(商工學校) ·광무학교(鑛務學校) ·직조학교(織造學校) ·공업전습소(工業傳習所) 등의 근대적 기술교육이 탄생하였는데, 우무학당(郵務學堂) ·전무학당(電務學堂)의 설립은 이보다 2년 앞섰다. 같은 해 한성(漢城)중학교가 설립되어 1906년 4년제 관립한성고등학교로 승격하였고, 한성고등여학교는 1908년 설립되었다. 1897년 유년(幼年)학교가, 3년 후 육군사관학교가 각각 설립되었으나 1909년 7월에 폐지되었다. 국권피탈 당시부터 1945년 8 ·15광복에 이르기까지 36년간 학교교육 진전의 양상은 교육령(敎育令) 개정을 통해서 대강을 살필 수 있다.

교육령은 크게 네 차례에 걸쳐서 개정되었다. 제1차 조선교육령(1911), 제2차 개정교육령(1922), 제3차 개정교육령(1938), 제4차 개정교육령(1942) 등과 같이 교육령이 공포되었는데, 이는 일본 교육정책의 전환과 사회정세의 즉각적인 반영이었다. 처음에는 되도록 정도를 낮추는 데 힘썼으며, 데라우치[寺內] 총독의 실용주의를 내건 식민지정책은 사이토[齊藤] 총독의 문화정책으로 바뀌고 교육의 연한도 연장되었다. 그 후 ‘내선일체(內鮮一體)’ ‘동근동조(同根同祖)’를 내건 결과는 한글 폐지에까지 이르렀으며, 마침내 군국주의적 교육을 지향하고 황국신민(皇國臣民)의 배양에 힘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