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영익

민영익

[ 閔泳翊 ]

요약 명성황후의 친정 조카로, 조선 개화기 개화업무를 이끌었고 후에는 고급관료로서 국가에 큰 영향을 끼쳤다.
출생-사망 1860 ~ 1914
본관 여흥(驪興)
우홍(遇鴻)
운미(芸楣)·죽미(竹楣)·원정(園丁)·천심죽재(千尋竹齋)

본관은 여흥(驪興)이며 아버지는 민태호(閔台鎬)이다. 1877년 정시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참의가 된 후 여러 중책을 맡았고 개화당 일파로 활약하였다. 1881년에 통리기무아문의 12사 가운데 군무사 당상이 되어, 별기군의 교련소 당상관으로서 임오군란(1882. 7)이 일어날 때가지 별기군의 실무책임자 역할을 하였다.

구식군대에 의해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최고책임자인 민겸호(閔謙鎬)가 피살당하고 민영익 역시 그 책임자로서 가옥이 파괴당하는 피해를 입었다. 군란이 진압된 후, 일본이 입은 피해에 대하여 사죄사절로 박영효(朴泳孝)가 파견될 때 김옥균과 함께 비공식 사절로 동행하여 3개월간 일본에 머물면서 신진개화문물을 견학하였다. 중국 톈진[天津]에도 파견되어 해관(세관 稅關)사무를 교섭하였다. 1882년 5월 주한미국공사 푸트(L. H. Foote)가 내한하자, 6월에 그에 대한 보빙사의 정사(正使)로 임명되어 친선사절로서 미국을 방문하였다. 방문단에는 홍영식·서광범·변수·유길준 등 개화파 인물이 수행하여 선진문물 도입에 역할을 하였다. 당시에 미국 아서(C. A. Arthur) 대통령을 예방하고 한글 국서를 제정하여 양국간의 우호와 교역에 대하여 논의하였다. 특히 미국 대통령 예방시 한국 전통식 절의 예절이 미국 문화에 큰 충격을 주기도 하였다.

미국의 선진 문물을 견학하였는데, 세계박람회·시범농장·방직공장·의약제조회사·병원·전기회사·철도회사·소방서·육군사관학교·해군연병장 등을 시찰하였다. 워싱턴의 내무성 교육국장 이튼(J. Eaton)을 방문하여 미국의 교육제도를 소개받고, 교육국사(敎育局史)와 연보를 기증받았다. 그 밖에 우편제도, 전기시설, 농업기술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관찰하고, 우리나라에서 우정국(郵政局), 경복궁의 전기시설, 육영공원, 농무목축시험장 등을 신설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후에 육영공원(育英公院 - 최초의 근대식 관립학교)을 설립하고 미국공사 푸트를 통해 이튼 교육국장의 도움으로, 미국 신학생 출신인 헐버트(H. B. Hulbert), 번커(D. A. Bunker), 길모어(G. W. Gilmore) 3명을 교사로 초빙하게 되었다. 한·미간 문화교류 활동으로서 스미스소니언(Smithsonian) 박물관에 조선 약용식물 표본을 기증하였고, 귀국시에는 타작기·벼베기·저울 등 농기구를 가지고 왔다. 귀국 시 유럽을 경유하여 유럽 문화를 견학하고 돌아왔다(1884. 5).

귀국 후에는 고급관료직을 맡고 보수화하여 개화파를 압박하는 입장으로 변하였다. 김옥균이 중심이 되어 갑신정변(甲申政變 1884. 12)을 일으켜 정부관료를 공격하였고, 민영익은 온몸에 자상을 입어 목숨이 위험하게 되었다. 이 때 미국인 의사 알렌(H. N. Allen)의 치료를 받고 회복하였고, 이를 기회로 서양 의술에 대한 인식이 전향적으로 크게 변하였다.

정치적 입장이 보수파로 바뀌면서 개화파와 등을 지게 되었고, 김옥균이 일본에 망명중일 때 그를 암살하기 위해 자객을 보내기도 하였으나, 일본의 방해로 실패하였다(김옥균은 후에 중국으로 이동하여 중국에서 암살당함). 임오군란 당시 중국으로 납치당한 대원군의 귀국을 반대하는 입장을 북양대신 리훙장(이홍장/李鴻章)에게 전하기도 하였다. (대원군은 1885년 8월 귀국하였음)

그의 정치노선 등이 문제가 되어 반대파에 몰려 중국 망명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1886년에는 정부의 친로정책을 반대하고 이를 청나라 위안스카이(원세개/袁世凱)에게 밀고하였다가 정치적 위협을 당하여 잠시 중국으로 망명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1894년에는 선혜청 당상이 되었으나 후에 고종의 폐위음모사건에 연루되어 또 다시 홍콩·상해 등지로 망명하였고, 1905년에는 을사늑약으로 친일정권이 수립되자 다시 상해로 망명하였다. 그곳에서 일생을 마쳤다.

그는 왕비의 척족으로서 급성장하여, 이조참의, 금위대장, 친군영, 한성부판윤, 병조·이조·호조·예조판서 등 고위직을 두루 거쳤다. 그러나 친청·보수파로 친일파나 개화파의 공격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서화에도 조예가 깊어 행서(行書)에 능하였고 그림을 잘 그렸다. 중국에 머물 때는 중국의 서화가들과 교유하였다.

역참조항목

변수, 미국과 조선의 관계, 민영선, 민정식, 노근묵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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