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복

양복

[ Western clothes , 洋服 ]

요약 서양풍 남녀 의복의 총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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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는 1894년 갑오개혁(甲午改革)을 계기로 정부가 서양문명을 받아들여 제반제도를 개혁하는 데에서 복제개혁에 따라 입게 되었다. 96년(고종 33) 4월 7일 칙령 제78호로 육군복장규칙을 제정하여 구군복을 폐지하고 서양식 육군복장을 제정하였으며, 1900년(광무 4) 4월 17일 칙령 제14호로 문관복장규칙을 정하였고, 제15호로 문관대례복제식(文官大禮服制式)을 정하여 서양식 관복으로 바꾸었다. 서양식 문관복은 일본을 통해서 들어온 것이며, 일본은 영국의 대례복을 모방한 것이었다. 개화기의 양복은 주로 관복으로 입은 것이며, 일부 상류층에서만 드물게 볼 수 있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상의 칙령은 군복과 공복(公服)에 관한 규정이지 일반 남자나 부녀자들의 복장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조선왕조실록》 《서유견문》 《고종시대사》 등 한말의 자료를 보면 공복이 아닌 일반시민복으로서 양복을 제일 먼저 입은 사람들의 일화가 기록되어 있다. 1881년을 전후하여 정부의 수신사 또는 신사유람의 자격으로 일본에 파견된 개혁파 정객, 김옥균 ·서광범 ·유길준 ·홍영식 ·윤치호 등이 양복을 사입고 돌아와 물의를 일으켰는데, 이들이 한국인으로서는 제일 먼저 양복을 입은 사람들이었다. 양복은 문명 개화의 선두에 선 사람들이 착용한 것이라 해서 한때는 개화복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이들이 입은 양복은 영어로 색코트(sack coat)라는 것으로, 18세기에 유럽에서 스포츠복으로 등장하여 미국에서 크게 유행하였으며 1870년대부터 남성들의 평상복이 된 것인데, 깃은 턱 밑으로 바싹 다가가 있고 앞섶이 가슴에서 무릎까지 벌어졌으며, 와이셔츠는 칼라가 둥근 크라이앵 셔츠이고 넥타이는 보타이처럼 생긴 크라바트였다.

그러나 이들이 양복을 사입은 후 한국에서 양복 착용이 법령으로 공인을 받기까지는 14년의 세월이 걸렸다. 그 후 일부 상류귀족과 외교관, 해외유학을 한 고급관리들은 프록코트나 색코트를 한복 대신 신사의 평상 복장으로서 착용하는 일이 많아졌다. 남자보다 조금 뒤져서 양장을 하는 여성도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1899년 외국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윤치오(尹致旿)의 부인이 양장을 입은 것이 효시이고, 1900년에는 외국유학을 마치고 한국 최초의 여의사가 된 박에스터가 양장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진명여학교 여교사 에밀레 황이 양장을 하고 다녔다. 이들이 양장에 양산을 쓰고 거리에 나타나면 호기심 어린 대중이 구경나와 앞뒤로 막아서서 좀처럼 길을 가지 못했다고 한다. 비슷한 연대에 고종황비(高宗皇妃)인 엄비(嚴妃)도 양장에 모자와 양산을 갖추고 기념촬영한 사진이 있다.

그러나 이 때는 일부의 상류귀족 여성들과 외교관 부인, 해외유학을 하고 온 고급관리의 부인, 선구적 개화여성들에게만 양장이 유행하였는데, 양장의 형태를 보면, 상류여성들은 당시 유럽 상류사회에서 유행한 버슬 드레스를 착용하였고, 개화여성들은 당시 선교사들이 입은 것으로 짐작되는 테일러 슈트나 깁슨 스타일, 자고 드레스, 도렌 드레스 등을 입었다.

교복으로서 양복을 가장 먼저 채택한 학교는 남자학교로는 배재중학교이고, 여학교로는 숙명여학교였다. 갑신정변(甲申政變)에 실패하고 미국으로 망명했던 서재필(徐載弼)이 1896년 귀국하여 그 해 4월에 《독닙신문》을 발간했는데, 동지 4월의 ‘논설’에서 의생활의 개선을 강조하였고, 6월 16일자 ‘잡보’란에서는 배재학당 학도들이 머리 깎고 제복 입은 모습이 활발하고 믿음직스럽다고 찬양하였다. 숙명여학교는 당시의 간호복과 비슷한 형태인 영국의 메린스식(式) 자줏빛 원피스에 안을 받친 분홍색 보닛을 갖추어 유럽식으로 교복을 제정하였다. 이와 같은 교복은 재래식 한복에 변화를 가져왔고, 당시의 개화사조나 양복의 형태를 반영하였다.

그 무렵 서양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라서 거추장스러운 코르셋과 버슬 드레스에서 쇼트 스커트라는 통형의 기능적인 20세기 스타일로 바뀌었다. 한국에서도 종전보다 다소 간편해진 스타일인 테일러 슈트나 재킷 슈트, 원피스 등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는데, 1920년대는 여성의 지위 향상과 아울러 활발한 사회진출로 말미암아 1910년대에 국권피탈로 위축된 복식계도 다시 활발한 활동과 변화를 보이는데, 당시 동덕여학교장 송금선(宋今旋)은 신문이나 잡지를 통해 양복을 입자는 글을 발표하였으며, 곳곳에서 재단 강습회가 열렸다. 블라디보스토크 공립양복학교를 졸업한 이정희(李貞嬉)는 1922년 남녀양복과 어린이 양복을 만들어냈고, 일본에서 돌아온 오엽주(吳葉舟)는 1920년 화신백화점에서 개업하여 단발머리를 보급시키기도 하였다. 당시의 양장미인의 패션은 망토 ·코트 ·흰 원피스 ·재킷 ·투피스 ·플리츠 스커트 ·스카프 ·넥타이 등이었다.

그러나 주류는 역시 한복이었으며 양장은 단편적으로 사용되었는데, 당시 양장미인의 치마길이는 무릎 밑까지 올라갔고 소매는 어깨선에 가깝도록 짧아졌다. 또 20년대의 특기할 만한 것은 장갑과 우산과 수영복의 등장이다. 당시의 수영복은 20년대 초에는 종아리와 팔꿈치 아래만 노출시킨 것이었는데 28년경에는 팔과 다리가 모두 노출되는 것이었다.

30년대에도 대부분은 한복을 입었으나 일부 상류사회의 여성이나 일본 ·미국 등지의 유학생들은 플레어 스커트 ·세퍼릿 슈트 ·스포티 코트 등을 착용하였다. 30년대에는 일제가 여학교의 한복교복을 세일러복으로 바꾸어 제정하여 착용을 강요하자, 일반여성들에게도 블라우스나 스웨터 ·스커트 ·세일러복 ·스포츠 웨어 ·스카프 ·모자 등의 양장이 비교적 많이 보급되기 시작하였다. 헤어스타일은 20년대에 일부에서만 단발이 유행했는데 37년경부터 핀컬과 퍼머넌트가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1910년 국권피탈 이후 침체된 양장의 변화는 30년대에 좀 활발해지는가 했으나 일제 말기의 카키색 국민복 및 여성의 몸뻬 착용 강요로 진전을 보지 못하고, 전국에 보급된 몸뻬와 원피스식 간편복, 군국조(軍國調)의 카키색 국민복 등은 모든 국민의 필수복이 되었다.

8 ·15광복 후 한국의 복장은 많은 변화를 보였는데, 한복은 노년층이나 일부 농촌지역의 복장으로 후퇴하고 양복이 일상생활에 파고들어 현대 한국인의 복장으로서 확고한 자리를 굳혔다.

6 ·25전쟁의 참화를 겪었으면서도 60년대는 C.디오르의 처진 어깨와 우아한 롱스커트가 등장하여 우리의 의상계를 풍미하였고, 70년대는 화학섬유의 발달과 더불어 의료(衣料)의 풍족으로 기성복이 발전함으로써 패션 산업의 소지를 만들었으며, 80년대에는 캐주얼 스타일이 의상계를 이끌었다. 서양복장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 특색, 즉 젊은층의 리더십, 레저복의 전파, 남자복의 컬러화, 논슈트화, 기타 유행의 다양화 등이 그대로 한국의 복장에도 새로운 현대적 요소로서 가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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