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안 해저유물

신안 해저유물

[ 新安海底遺物 ]

요약 전남 신안군 증도면 방축리 도덕도 앞 바다(동경 126°05 '06 ", 북위 35°01 '15")에서 발굴된 일괄유물.
신안해저문화재

신안해저문화재

소장 국립중앙박물관
소재지 서울특별시 용산구 서빙고로 137 (용산동6가 168-6)
시대 고려시대(1323년)
종류/분류 청자, 백자, 흑유, 백탁유, 잡유, 금속제품, 석제품, 목제품, 칠기, 토기, 화폐 등

발굴 장소의 수심은 20m 이상이고, 해류가 탁류를 이루면서 급하게 흐르므로 시계(視界)가 없는 해저이다. 1976년 1월, 이곳 어부의 그물에 중국 룽취안요[龍泉窯]의 청자(靑瓷)가 인양되어 매장문화재 발견신고가 있은 후, 이해 10월부터 문화재관리국이 주축이 되어 국립박물관·서울대학교·전남대학교·문화재연구소 등으로 발굴단을 구성하고 제1차 발굴을 시작하였으며, 유물의 인양 작업은 해군의 심해잠수부가 담당하였다. 이후 1984년까지 제11차 발굴이 진행되었다.

발굴 유물은 청자·백자·흑유(黑釉)·백탁유(白濁釉)·잡유(雜釉)·금속제품·석제품(石製品)·목제품(木製品)·칠기(漆器)·토기(土器) 등이며, 그 수량은 2만 8000여 점에 달하였는데, 이 중 청자가 9,600여 점으로 가장 많다. 이 유물은 침몰된 거대한 목선(木船)에 실려 있었다. 목선의 가장 밑바닥 부분에는 동전(銅錢)이 가득 실려 있었는데, 1984년까지 약 20t이 인양되었다. 그리고 향목(香木)으로 쓰거나 가구재(家具材)가 되는 자단목(紫檀木) 500여 점(약 8t)과 글씨를 쓴 목간(木簡) 300여 점 및 한약재(漢藥材)도 발굴, 인양되었다. 이들 유물은 상품(商品)이 대부분이나, 선원들이 항해하면서 사용하던 일부 생활용품도 포함되어 있었으며, 인골(人骨)의 일부도 발굴되었다. 한편, 침몰선의 선체(船體)도 분해, 인양되었다.

청자 중에 고려청자 3점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청자음각연당초문매병(靑瓷陰刻蓮唐草文梅甁) 1점, 청자상감운학문대접(靑瓷象嵌雲鶴文大楪) 1점, 청자상감연당초문잔대(靑瓷象嵌蓮唐草文盞臺) 1점이다.

그밖의 청자는 중국 저장성[浙江省] 룽취안요 계통으로 원대(元代)의 작품이 대부분이고, 송대(宋代)의 기법을 보이는 청자도 있다. 종류를 보면, 모란무늬·용무늬 등이 새겨진 화병이나 일반병이 많고, 줄무늬·용무늬·모란무늬 등이 새겨진 항아리, 무늬가 없는 소문(素文)·정병(淨甁)·대반(大盤)·주전자·대접·접시·사발·잔·향로 등이다. 특히 '사사수부 공용(使司帥府公用)'이라 새긴 화문(花文)접시가 여러 개 발견되었는데, 이는 원나라 지방기관인 선위사사도원수부(宣慰使司都元帥府)에서 사용하기 위하여 만든 공용품(公用品)으로 보인다.

백자는 중국 장시성[江西省] 징더전요[景德鎭窯] 계통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데, 유약에 약간 푸른 색이 도는 청백자 계통과 흰 순백자 계통으로 나눌 수 있다. 순백자 중에는 징더전요의 추부계(樞府系) 백자가 상당량 포함되어 있고 ‘복록(福祿)’ 등의 글씨가 양각된 것도 있다. 종류에는 항아리·병·대접·접시·향로·주전자·잔·연적(硯滴) 등이 있으며, 용무늬나 모란무늬·당초무늬가 새겨지기도 하고, 철반무늬[鐵斑文] 또는 철화(鐵畵)로 천록(天鹿)이나 연꽃을 회화적으로 그린 것도 있는데, 이것은 모두 원대(元代)의 특색을 잘 나타내고 있다.

흑유(黑釉)는 천목(天目)과 일반 흑유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는데, 천목은 허난[河南] 천목 계통과 유사한 것이 있고 일반 흑유는 칠흑색(漆黑色)·흑갈색·다갈색 등이다. 흑유의 종류는 항아리·단지·잔·사발 등이다. 백탁유 계통의 화분(花盆)이 많고 백유흑화(白釉黑畵)의 항아리와 병이 있으며, 옹기 같은 단지들이 많다.

그밖에 금속제품으로는 은으로 만든 정병(淨甁)·매병(梅甁)·접시 등이 있고, 청동으로 만든 촛대·향로·거울·바라(악기)·자물쇠·주전자·세발두꺼비·수저·냄비·적자(炙子)·사발 ·인물상 등 종류가 다양하다. 돌로 만든 벼루·맷돌·동물조각 및 숫돌 외에 유리제품도 있고, 나무로 만든 용기들과 도자기를 포장했던 상자 및 불상 등도 나왔다. 철기는 잔이나 발(鉢)·벼루·쟁반 등이 있고, 백동정(白銅鋌)도 많이 인양되었다. 한약재로서 초과(草果)·호초(胡椒)·산수유·아출(莪朮)·파두(巴豆) 등이 있었다. 특히 동전은 오수전(五銖錢)을 비롯한 70여 종(嘉祐元寶·嘉定通寶·開元通寶·乾元重寶·景德元寶·景祐元寶·景定元寶·萬國通寶 ·大觀通寶 ·大定通寶 ·明道元寶 ·祥符元寶 ·宣和通寶 ·聖宋元寶 ·紹聖元寶 ·紹熙元寶 ·宋元通寶 ·淳化元寶 ·淳熙元寶 ·元符通寶 ·元祐通寶 ·元豊通寶 ·正隆元寶 ·政和通寶 ·至道元寶 ·至和元寶 ·天聖元寶 ·天禧通寶 ·治平元寶 ·咸平通寶 ·皇宋通寶 ·熙寧通寶 ·紹定通寶 ·至大通寶)이 나왔는데, 그 중에서 가장 늦은 시기의 돈은 1310년에 제작된 지대통보(至大通寶)이다.

목간(木簡)은 물표(物標)가 대부분인데 ‘지치 3년 6월 1일(至治三年六月一日)’이라는 글씨가 나와 이 배가 침몰한 상한연대를 추정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이 해는 곧 1323년에 해당한다. 선체는 10개의 격벽구간으로 구성되어 비스듬히 침몰되어 있었는데, 늑골(肋骨)은 너비 67cm, 두께 52cm의 거대한 송목(松木)이었으며, 외판(外板)은 늑골을 중심으로 좌우에 두께 약 12cm, 너비 40∼50cm의 판재가 12판씩 크링커식으로 강한 접착제를 사용하여 접착되어 있고, 그 외부에 또 두께 1cm 정도의 보호판이 붙어 있었다. 이 배의 앞은 사다리꼴이며, 복원치의 배 너비는 약 10m, 배 길이는 30m가 넘는 큰 규모의 목선이었다.

이 유물선은 중국 푸젠성[福建省] 푸저우[福州]의 조선창(造船廠)에서 철저한 고증을 거쳐 당시의 기법으로 중국인들의 손에 의하여 복원되어, '700년 전의 약속'호로 명명되었다. 복원된 유물선은 길이 31m, 너비 9m, 높이 10m의 목선으로, 1996년 7월에 당시의 항로를 따라 중국의 닝보[寧波:당시의 慶遠]를 출발, 목포와 신안을 거쳐 일본의 하카타[博多]에 이르는 뱃길 3,000km를 탐사하였다.

한편, 일본 유물로서 왜 나막신(게타)·일본도(刀)·청동거울·장기·칠기·도기 등 생활용구가 일부 인양된 것으로 보아 이 배는 당시 일본을 왕래한 중국의 무역선으로 추정되며, 1323년에 가까운 어느 시기에 침몰되었음이 분명하다. 이 방대한 규모의 해저유물들은 당시의 교역사와 동양문화사를 밝히는 데 중요한 자료로서,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