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미양요

신미양요

[ 辛未洋擾 ]

요약 1871년(고종 8) 미국이 1866년의 제너럴 셔먼호 사건을 빌미로 조선을 개항시키고자 강화도를 공격한 사건.
신미양요의 희생자

신미양요의 희생자

배경

19세기 서구 열강의 아시아 진출이 가속화되고, 1842년 아편전쟁(阿片戰爭, 제1차 중영전쟁)의 결과로 영국난징조약(南京條約)을 체결하여 개국(開國)하자, 1844년 미국도 청과 왕샤조약[望厦條約]을 체결하여 동아시아 진출에 나섰다. 1854년 미국은 일본미일화친조약(美日和親條約)을 체결하여 일본을 개국시켰다. 그러나 1861년 남북전쟁(American Civil War, 南北戰爭)의 발발로 미국은 한동안 동아시아에 관심을 둘 수 없었고, 전쟁이 끝난 1865년부터 다시 아시아에 파견한 함대의 전열을 재정비하며 아시아 팽창주의를 이어나갔다.

그러던 1866년 조선에서 제너럴 셔먼호가 격침되었다는 소식이 주청미국공사관에 전해졌고, 조선에 강경하게 대응할 것을 계획하였다. 1867년 미국은 로버호(Rover)가 타이완에 표류하였다가 그곳의 주민에게 몰살되자 이에 대한 강경한 무력 보복 조치를 시행한 바 있었다. 제너럴 셔먼호 사건도 로버호 사건과 비슷한 사례로 보고, 미국인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한편, 조선을 개국하여 새로운 교역로를 개척하려 한 것이다.

경과

먼저 주청미국공사 버링게임(A. Burlingame)은 청을 통한 조선 압박, 영국 및 프랑스와의 공동 출병이 무산되자 미국 아시아 함대 사령관 벨(A. H. H. Bell)에게 제너럴 셔먼호 사건의 진상을 조사하기 위한 함대의 파견을 요청하였다. 이에 와츄세트호(Wachusett)가 청의 즈푸[芝罘]에서 출항하여 조선의 황해도 장연(長淵)에 이르렀다. 그곳에서 서양의 배가 대동강에서 침몰되었고, 서양인 2명이 구금되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와츄세트호는 조선과의 교섭을 시도하였으나, 조선은 제너럴 셔먼호 사건에 대해 아는 바가 없으며, 돌아갈 것을 요구하였다. 결국 와츄세트호는 즈푸로 귀항하게 되었다.

1868년 4월 미국은 조선에 억류된 서양인이 미국인일 것으로 보고, 재차 아시아 함대의 셰넌도어호(Shenandoah)를 조선에 파견하였다. 셰넌도어호는 황해도 풍천(豐川)에 이르러 제너럴 셔먼호 사건의 진상과 억류된 미국인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조선은 청의 예부(禮部)에 제너럴 셔먼호 사건에 대해 보고한 문서를 토대로 미국에 답변하였고, 제너럴 셔먼호가 평양의 관민을 구금하고 공격한 것이 격침의 원인이며, 조선에 미국인 2명이 구금되었다는 것은 청나라 향도(嚮導)의 거짓말이었음이 확인되었다. 이러한 사실을 파악한 셰넌도어호는 1868년 5월 즈푸로 귀항하였다.

미국은 이후에도 조선의 개국을 시도하고자 하였으나, 미국의 대통령이 율리시스 그랜트(Ulysses Simpson Grant)로 바뀌면서 시일이 지체되었다. 1870년 11월 미국은 청의 중재를 통해 조선과 통상 교섭을 하고자 하였으나, 청이 이를 거절하였다. 청을 통해 조선으로 보낸 미국의 통상 교섭 요청도 조선이 거부하였다. 이에 미국은 1871년 5월 조선으로 보낼 함대를 일본의 나가사키[長崎]에 집결시켰다. 이때 집결된 미국의 함대는 존 로저스(John Rodgers)를 사령관으로 하여 군함 5척과 군인 1,230명으로 구성되었고, 5월 16일에 조선을 개국시키기 위하여 출항하였다.

미군은 5월 16일에 충청도, 19일 남양만에 이르러 뱃길을 탐사하면서 북상하여 23일에 아산만의 입파도(立波島)에 도착하였다. 미군은 강화도까지 가는 수로를 탐색하기 위한 정찰대를 파견하였고, 30일에는 인천의 작약도(芍藥島)에 정박하였다. 그리고 30~31일에 조선과 미군의 교섭이 이루어졌으나, 미군은 조선에서 온 관원이 전권대사가 아니고 품계가 낮음을 이유로 교섭을 계속 진행하지 않았다. 아울러 미군은 강화해협과 한강의 수로를 탐색하고 측량할 것임을 조선에 통보하였는데, 조선은 이를 승인하지 않았다.

광성보싸움

6월 1일 미군은 다시 강화해협과 한강의 수로 탐색을 위한 정찰대를 파견하였다. 미군의 정찰대가 광성보(廣城堡)가 위치한 손돌목 어귀에 이르자 광성보를 중심으로 한 조선군이 미군을 공격하였다. 조선군과 미군은 포격전을 벌였으나, 미군의 무기를 따라갈 수 없었고, 광성보가 곧 초토화되었다. 반면 미군은 부상자 2명의 발생에 그쳤다. 이에 미군은 조선군이 불법적인 선제 공격을 가하였다고 주장하며 조선의 공식적인 사과와 보상을 요구하였다. 조선은 광성보에서의 포격이 정당 방위였음을 거듭 주장하였고, 미군은 상륙작전을 전개하기로 결정했다. 강화도의 조선군을 궤멸시키고 한강 하류를 봉쇄하면 조선이 협상에 응할 것이라 보았기 때문이다.

6월 10일 미군은 650여 명을 동원하여 강화도의 초지진(草芝鎭)을 공격하였다. 조선군은 미군에 발포하여 상륙을 저지하고자 하였으나, 미군 군함의 포격으로 실현하지 못하였다. 초지진이 초토화되자 미군의 상륙이 시작되었고, 조선군은 초지진을 버리고 후퇴하였다. 같은 날 밤에는 초지진을 지키던 병마첨절제사(兵馬僉節制使) 이렴(李濂)이 미군의 기지를 야습하였으나 패배하여 광성보로 물러났다.

6월 11일 미군은 초지진에서 덕진진(德津鎭)으로 이동하여 공격을 개시하였다. 앞서와 마찬가지로 군함의 포격이 덕진진을 초토화시켰고, 미군은 피해 없이 덕진진을 점령하였다. 곧 미군은 이동을 재개하여 광성보로 향하였고, 바다와 육지 양면에서 광성보를 공격하였다. 당시 광성보에는 진무중군(鎭撫中軍) 어재연(魚在淵)이 이끄는 조선군이 주둔하였는데, 1시간에 걸친 미군의 포격으로 상당한 타격을 입었다. 그리고 조선군과 미군 사이에 백병전이 벌어졌고, 어재연을 비롯한 조선군 350여 명은 광성보에서 전멸하였다. 반면 미군은 사망 3명, 부상 10여 명이라는 경미한 피해만 입었다.

결과와 영향

조선은 미군의 강화도 공격을 비난하였고, 미군은 6월 14일 조선군 포로를 석방한 뒤 자신들의 행위는 적법하였음을 역설하였다. 또한 조선에 고위 관원을 파견하여 교섭에 나설 것을 촉구하였다. 그러나 조선은 계속해서 미군의 교섭 요청을 거절하였고, 미군은 교섭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으로 보고 7월 3일 즈푸로 귀항하였다.

결국 미군은 조선에서 아무런 성과 없이 철수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은 한양의 종로와 전국 각지에 척화비(斥和碑)를 세워 통상수교거부정책을 더욱 강화하였다. 군사 방면에서도 삼군부(三軍府)가 정비되어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또한 병인양요, 남연군분묘도굴사건, 신미양요 때 천주교 신자의 협력이 드러나면서 천주교에 대한 강도 높은 탄압이 이루어졌다.

한편 광성보에서 전사한 어재연의 수자기(帥字旗, 장군의 깃발)는 미군이 전리품으로 가지고 돌아가 미국해군사관학교에 보관되었는데, 2007년 임대 방식으로 한국에 반환되어 강화역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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