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너럴 셔먼호 사건

제너럴 셔먼호 사건

[ ─號事件 ]

요약 1866년(고종 3) 미국 상선(商船) 제너럴 셔먼호가 평양에서 통상을 요구하다 격침된 사건으로 신미양요의 원인이 되었다.

1866년 미국인 프레스턴(W. P. Preston) 소유의 제너럴 셔먼호(General Sherman)는 톈진[天津]에 체류 중이었다. 선주(船主) 프레스턴은 영국의 메도스 상사(Meadows 商社)와 용선(傭船) 계약을 체결하고 비단·유리제품·천리경(千里鏡)·자명종(自鳴鐘) 등의 상품을 적재하여 조선에 가기로 하였다. 이에 프레스턴을 비롯하여 덴마크인 선장 페이지(Page), 항해사 윌슨(Wilson), 화물관리인 영국인 호가스(G. Hogarth), 통역사 토머스(R. J. Thomas, 崔蘭軒, 선교사)와 19명의 선원을 태우고 1866년 7월 29일 텐진을 출항하였다.

8월 중순에 제너럴 셔먼호는 백령도에 도착하였고, 청나라 상선을 만나 대동강에 이르는 수로를 안내받아 8월 16일 평안도 용강현(龍岡縣) 다미면(多美面)에 이르렀다. 이에 용강현령 유초환(俞初煥)은 제너럴 셔먼호에 관원을 파견하여 방문 목적을 물었고, 통역사인 토머스는 자신들은 평양으로 갈 것임을 밝히고 무기류의 성능을 보여주었다. 이후 제너럴 셔먼호는 황주(黃州)로 이동하였고, 이곳에서부터는 청나라 상선이 귀항하여 단독으로 행동하게 되었다. 8월 17일 황주목사 정대식(丁大植)이 재차 제너럴 셔먼호에 방문 목적을 물었고, 토머스는 평양으로 가 교역할 계획임을 밝혔다. 황주목사는 서양과의 교역은 국법으로 금지된 것이므로 불가하며 돌아갈 것을 통보하였으나, 제너럴 셔먼호는 이에 불응하고 무기류의 성능을 보여주고 식자재와 직물(洋布)의 교역을 제의하였다. 황주목사는 교역에 불응하고, 식자재를 제공하며 재차 돌아갈 것을 요구하였다.

제너럴 셔먼호는 조선의 회항 요구를 묵살하고 8월 20일에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평양 경내에 들어왔다. 마침, 프랑스의 군함이 내침(來侵)할 것이라는 소문이 시중에 나돌고 있었기 때문에 관원들은 전전긍긍하며 긴장하고 있을 때였으므로 셔먼호가 평양 경내에 정박하는 것을 보자 평안병사(平安兵使) 이용상(李容象)이 8월 21일 제너럴 셔먼호의 토머스와 필담하여 방문 목적을 묻고 돌아갈 것을 재차 요구하였다. 그러나 제너럴 셔먼호는 조선이 천주교를 박해한 이유를 묻고, 교역을 요구하였으며, 식료품과 직물의 교환을 제의하였다. 이에 평안병사는 이전까지 이양선(異樣船)에 인도주의 차원으로 식자재를 공급해 주었던 관례에 따라 제너럴 셔먼호에 식자재를 제공하였다. 그러나 제너럴 셔먼호는 대동강 수로 탐사를 시작하고, 불법으로 상륙하여 평양 지역 사람들에게 포교하였다.

8월 27일 조선의 강경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제너럴 셔먼호는 만경대(萬景臺) 한사정(閑似亭)에까지 올라왔고, 그들의 행동을 제지하던 순영중군(巡營中軍) 이현익(李玄益)을 붙잡아 감금하였다. 조선은 이현익 일행의 석방을 요구하였으나, 제너럴 셔먼호는 응답하지 않았다. 8월 28일 조선은 군사를 이끌고 이현익 일행의 석방을 요구하였으나, 제너럴 셔먼호는 석방의 대가로 금·은·인삼 등을 요구하였고, 조선이 이를 거부하자 위협사격을 가하였다. 그리고 보통강 하구로 대포와 소총을 쏘며 이동하였다. 사태가 이에 이르자 평양의 관민(官民)은 크게 격분하여 강변으로 몰려들어 제너럴 셔먼호의 소형 선박에 돌을 던지며 이현익의 석방을 격렬하게 요구하였고, 8월 29일 퇴교(退校) 박춘권(朴春權)이 재차 항의하자 제너럴 셔먼호는 이현익 일행을 석방하였다.

한편 평양감사(平壤監司) 박규수(朴珪壽)는 제너럴 셔먼호가 여러 번의 경고에도 물러가지 않자, 조정에 사건을 보고하고 대응 지침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식자재를 구하러 나온 제너럴 셔먼호의 선원이 평양의 주민 7명을 사살하고 5명을 부상시키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에 박규수는 조정의 지침을 기다릴 수 없다고 판단하여 제너럴 셔먼호에 불을 놓기로 결정하였다. 9월 5일 박규수는 철산부사(鐵山府事) 백낙연(白樂淵)과 서윤(庶尹) 신태정(申泰鼎)에게 2개 부대를 동원하여 제너럴 셔먼호를 공격하게 하였고, 제너럴 셔먼호도 이에 대응 사격하였다. 그러다 제너럴 셔먼호가 수심이 얕은 양각도(羊角島) 서쪽 모래톱에 좌초하면서 기동 불능 상태에 빠졌고, 박규수가 파견한 군대에 의해 배에 불이 붙었다. 이 결과 제너럴 셔먼호에 승선한 선원 24명은 전원 사망하게 되었다.

결과와 영향

조선 조정은 박규수와 관민을 치하하고, 제너럴 셔먼호에 관한 사건의 경과를 청나라 예부(禮部)에 통보하였다. 아울러 서양과의 교역을 더욱 엄금하였고, 변경 지역의 경계를 강화하였다. 제너럴 셔먼호의 격침에 성공한 조선은 서양을 자력으로 물리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고, 위정척사(衛正斥邪)는 더욱 힘을 얻게 되었다. 아울러 제너럴 셔먼호 사건은 1871년 신미양요(辛未洋擾)가 발생하는 원인으로 작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