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립

신립

[ 申砬 ]

요약 조선 중기의 무장. 북변에 침입한 이탕개를 격퇴하고 두만강을 건너가 야인의 소굴을 소탕하고 개선했다. 함경북도병마절도사, 우방어사, 중추부동지사, 한성부 판윤을 지냈고 임진왜란 때 충주 탄금대에 배수진(背水陣)을 치고 적군과 대결했으나 패했다.
출생-사망 1546 ~ 1592
본관 평산(平山)
입지(立之)
시호 충장(忠壯)
활동분야 군사

본관은 평산(平山)이고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1546년 명종 1년에 출생하였는데 아버지는 생원을 지낸 신화국(申華國)이고 할아버지는 이조판서를 지낸 신상(申鏛)이다. 어린시절부터 글공부 보다는 무예를 좋아했다고 전해지며 1567년(선조 즉위년) 22세 때 무과에 급제하였다. 선전관을 거쳐 도총부도사(都摠府都事) ·경력(經歷)을 지내고 진주판관(晉州判官)이 되었다.

1583년 온성부사(穩城府使)가 되어 북변에 침입해온 이탕개(尼湯介)를 격퇴하고 두만강을 건너가 야인(野人)의 소굴을 소탕하고 50여 명의 목을 베고 개선하였다. 이후 이탕개가 1만명의 군사를 이끌고 또다시 경원부(慶源府)와 안원보(安原堡)를 쳐들어오자 이를 물리치며 육진(六鎭)을 방어하는데 공을 세웠다. 1584년 야인을 물리친 공로로 함경북도병마절도사에 올랐다. 1587년 흥양(興陽)에 왜구가 침입하자 우방어사(右防禦使)가 되어 군사를 인솔하여 토벌에 나섰다가 이미 왜구들이 달아나는 바람에 철수하고 돌아오던 중 양가의 처녀를 첩으로 삼았다는 삼사(三司)의 탄핵으로 파직되었다. 하지만 곧 함경남도병마절도사에 다시 등용되었으나, 졸병을 참살한 죄로 중추부동지사(中樞府同知事)의 한직으로 전임되었다.

1590년 평안도병마절도사에 보직되고 이듬해 한성부 판윤을 거쳤으며,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삼도도순변사(三道都巡邊使)로 임명되어 충주로 내려가 방어선을 구축했다. 왜적의 수가 많고 대적하기 힘든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후퇴하지 않고 충주(忠州) 탄금대(彈琴臺)에 배수진(背水陣)을 치고 북상해오는 왜군과 전투를 벌였다. 하지만 군사력의 열세로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이끄는 대군에 포위되어 패배하였고 많은 양민들이 학살되었다. 부하 장수인 김여물(金汝岉)과 함께 강물에 투신 자결하였다.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신립 본문 이미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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