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용군

조선의용군

[ 朝鮮義勇軍 ]

요약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에 북만주에서 항일투쟁을 하던 의군부(義軍府) 산하 독립군부대.
구분 항일무장투쟁 조직
설립일 1919년 4월
설립목적 항일투쟁
소재지 중국 연길현

국내에서 활동하던 의병들이 중국 동삼성(東三省)으로 건너가, 국내의 독립선언에 자극받아 각지에 흩어져 있던 의병들을 규합, 의군부를 조직하였다. 의군부는 옌지[延吉] 명월구(明月溝)에 근거지를 두고 이범윤(李範允)·진학신(秦學新)·최우익(崔友翼)·김청봉(金淸鳳)·김현규(金鉉圭)·신립(申立)·고평(高平)·이을(李乙)·김종헌(金鍾憲) 등이 중심이 되어 그 산하에 조선의용군을 두었다.

이 단체는 김청봉과 허승완(許承完) 등이 조직하여 독립전쟁을 진두지휘하였는데 1년 2개월간 군세가 확장되어 6개 대대로 편성하고 활동무대를 허룽[和龍]·왕칭[王淸]·훈춘[琿春] 지역까지 확대하였다. 운영자금은 현지에 거주하는 한국동포들의 의연금으로 충당하였다.

같은 해 7월 조선의용군의 총수이며 중부 참모장인 고평은 일본과 반대세력에 대항하기 위해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와 동맹을 체결하고 용정(龍井)국자가(局子街) 등지에서 일본인과 친일파들에게 위협을 가하고, 만주 각지의 독립운동단체에 통일과 단결을 호소하였다.

1920년 8월 감사대(敢死隊) 150명을 선발하여 노야령(老爺嶺) 동북쪽에 매복시켰다가 중국과 불필요한 교전을 치르게 되어 서로 큰 손해를 입었다. 이에 총무부장 최우익이 이끄는 조선의용군 3개 중대가 급히 중간촌(中間村)에 도착하여 중국군을 퇴각시키고 이곳에 도착한 일본과 접전, 큰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최고 전략가인 최우익과 이을, 강도천(姜道天) 등 13명이 전사하였다.

북로군정서가 일본군과 청산리전투를 치르고 밀산(密山)으로 퇴각하였을 때 같이 헤이룽장[黑龍江]을 넘어 노령에 들어간 뒤, 1921년 6월 자유시(알렉세예프스크)에서 러시아와 충돌하여 큰 타격을 입었다. 1925년 대한독립군단 및 대한독립군정서를 주축으로 한 신민부에 합세하였다. 1942년 조선의용대 화북지대(華北支隊)를 개편하여 조직한 조선의용군과는 별개의 독립군부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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