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독립군

대한독립군

[ 大韓獨立軍 ]

요약 1919년 홍범도(洪範圖)가 의병 출신을 중심으로 창설한 항일 독립군 부대로 간도국민회와 연합하여 활발한 국내진공작전을 펼쳤으며,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의 승리에 크게 기여하였다.
홍범도

홍범도

구분 항일독립운동 단체
설립일 1919년
설립목적 민족독립의 성취
주요활동/업무 봉오동전투, 청산리전투
소재지 중국 지린성[吉林省]
규모 병력 400~3200명

1919년 홍범도(洪範圖, 1868~1943)가 의병 출신과 연해주(沿海州)와 간도(間島)에 거주하던 한국인을 중심으로 창설한 항일 독립군 부대이다. 1920년 3월 대한국민회군(大韓國民會軍)과 연합한 뒤 북간도(北間島) 지역에 거주하던 한국인의 자치단체인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 간도국민회라고도 함) 소속으로 활동했다. 1919년 8월 혜산진(惠山鎭) 공격을 시작으로 국내진공작전을 활발히 전개했으며, 1920년 3월 이후에는 북간도 지역의 독립군 부대의 연합을 주도하여 정일제일군(征日第一軍), 대한북로독군부(大韓北路督軍府), 동도독군부(東道督軍府) 등을 창설하여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의 승리에 크게 기여하였다.

대한독립군을 이끈 홍범도는 1895년 의병을 일으킨 뒤, 1907년 이후 갑산(甲山), 삼수(三水), 북청(北靑) 등지에서 여러 차례 일군에 승리를 거두며 함경도를 대표하는 의병장으로 이름을 떨쳤다. 1910년 이후 국내에서의 의병 활동이 어려워지자 간도를 거쳐 연해주로 망명하였으며, 차도선(車道善), 조맹선(趙孟善, 1872~1922) 등과 함께 포수단(砲手團)을 조직해 일본에 대한 항쟁을 계속하였다. 1918년 8월 일본이 러시아의 내전에서 백위군(白衛軍)을 지원하며 연해주를 침입해오자, 홍범도는 의병 출신과 연해주의 한국인을 중심으로 부대를 구성하여 유격 활동을 벌였다. 그리고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국내 진공을 위해 백두산 부근의 안투현[安圖縣]으로 이동하였으며, 대한국민의회의 간도, 훈춘[琿春] 지부(支部) 역할을 하던 대한국민회의 지원을 받아 대한독립군으로 부대를 재편하였다.

대한독립군은 1919년 8월 압록강을 건너 혜산진(惠山鎭)의 일본군 수비대를 습격하여 섬멸시켰는데, 이는 3.1운동 이후 전개된 최초의 국내진공작전이었다. 10월에도 다시 국내로 진공하여 강계(江界)와 만포진(滿浦鎭)을 점령했으며, 자성군(慈城郡)으로 진출해 일본군과 격전을 벌여 70여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리고 1920년 3월까지 최진동(崔振東, ?~1945)이 이끌던 군무도독부(軍務都督府)와 연합하여 두만강 연안의 회령(會寧), 종성(鐘城), 온성(穩城) 등으로 여러 차례 진공 작전을 펼쳤다. 대한독립군의 대대적인 국내진공작전은 한국인의 독립의지를 높이고, 만주에서 독립군의 무장 항쟁이 더욱 활발히 전개되는 계기가 되었다. 1920년 3월 대한독립군은 근거지를 안투현에서 왕칭현[汪淸縣]으로 옮겼으며, 더욱 규모가 큰 국내진공작전을 벌이기 위해 대한국민회의 재정 지원을 받아 연해주에서 무기를 구입하였다. 그리고 분산되어 있던 북간도 지역 독립군 부대의 통합에 나서 우선 대한국민회 자체의 군사조직으로 안무(安武, 1883~1924)가 이끌던 국민회군(國民會軍)과 연합해 '정일제일군(征日第一軍)'을 편성했다. 군의 재정과 행정은 대한국민회가 관장했으며, 대한독립군은 홍범도가, 국민회군은 안무가 각각 지휘하되, 군사 작전을 벌일 때에는 홍범도가 '정일제일군사령관(征日第一軍司令官)'으로 이끌도록 하였다. 그리고 1920년 5월 3일에는 최진동의 근거지인 왕칭현 봉오동(鳳梧洞)에서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군무도독부, 대한신민단(大韓新民團), 광복단(光復團), 의군부(義軍府) 등과 연석회의를 열어 연합을 추진했고, 여러 차례 공동 작전을 펼쳤던 군무도독부와 우선 연합하여 5월 28일 대한북로독군부를 결성했다. 대한북로독군부는 최진동이 부장(府長), 안무가 부관(副官)이 되어 행정과 정치, 재정 등을 주로 담당했다. 홍범도는 그 산하의 북로제1군사령부(北路第一軍司令部) 부장(部長)이 되어 군사를 담당했다. 병력은 4개 중대로 편성하여 이천오(李千五), 강상모(姜尙模), 강시범(姜時範), 조권식(曺權植) 등이 중대장이 되었으며, 봉오동에 집결해 대규모 국내 진공을 계획하였다.

1920년 6월 4일 박승길(朴承吉, 1893~1960)이 지휘한 대한신민단 소속의 독립군 부대가 함경북도 종성군(鐘城郡) 강양동(江陽洞)에 진입해 일본군 순찰소대를 습격해 타격을 입히자, 일본군 남양수비대(南陽守備隊)의 1개 소대가 두만강을 건너 삼둔자(三屯子)로 추격해와 양민을 학살했다. 독립군이 삼둔자에 매복했다가 일본군 추격대를 공격하여 큰 피해를 입히자, 일본군은 함경북도 나남(羅南, 지금의 청진)에 주둔하던 제19사단에 월강추격대대(越江追擊大隊)를 편성해 봉오동을 공격했다. 6월 7일 대한독립군과 국민회군, 군무도독부, 신민단의 연합부대는 봉오동에서 일본군 제19사단의 월강추격대대를 쳐부수고 큰 승리를 거두었다(봉오동전투). 6월 21일 대한독립군은 북로군정서를 제외한 다른 독립군 부대와도 연합하여 동도독군부를 편성했으며, 옌지[延吉] 즈런향[志仁鄕] 이란거우[依蘭溝]로 주둔지를 옮겼다. 그리고 7월 8일 라오터오거우[老頭溝]에서 독립군 색출에 나선 일본 경찰을 기습하여 승리하였으며(노두구전투), 10월에는 허룽현의 얼다오거우[二道溝], 싼다오거우[三道溝]로 이동하여 이 지역을 공격해온 일본군을 북로군정서 등과 연합하여 격퇴하였다(청산리전투).

청산리전투에서 패배한 일본군이 한국인들을 무차별 학살하고 마을을 불태우는 등 야만적인 간도참변(間島慘變)을 자행하며 대대적인 독립군 토벌에 나서자 대한독립군은 중국와 러시아의 국경 지대인 헤이룽장성[黑龍江省]의 미산[密山]으로 이동하였다. 그리고 1920년 12월 다른 독립군 부대와 통합해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을 조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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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오동 전투의 대한독립군 출처: doope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