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군

신성군

[ 信城君 ]

요약 조선 선조의 넷째아들이며 인빈 김씨의 소생이다.
출생-사망 1579 ~ 1592
시호 충정(忠貞)
본명 이후(李珝)
국적 조선
주요수상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
시대 조선시대

본관은 전주(全州), 성은 이(李), 이름은 후(珝)이다. 조선의 제14대 왕인 선조(宣祖, 재위 1567~1608)의 넷째아들이며, 어머니는 김한우(金漢佑)의 딸인 인빈 김씨(仁嬪 金氏, 1555~1613)이다. 1579년 1월 6일(선조 11년 음력 12월 10일)에 의안군(義安君) 이성(李珹, 1577~1588)에 이어 인빈 김씨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한성부판윤을 지낸 신립(申砬)의 딸 평산 신씨(平山申氏)와 결혼해 딸 하나를 낳았으며, 그 딸은 회양부사(淮陽府使) 안창(安昶)의 며느리가 되었다.

신성군(信城君) 이후(李珝)는 인빈 김씨가 한창 선조의 총애를 받을 당시에 태어나 선조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 그래서 동인(東人)의 영수였던 이산해(李山海)는 인빈 김씨의 오빠인 김공량(金公諒)과 함께 공빈 김씨(恭嬪 金氏, 1553~1577)의 소생인 임해군(臨海君) 이진(李珒, 1572~1609)과 광해군(光海君) 이혼(李琿, 1575~1641)을 제치고 신성군을 세자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기도 했다. 이들은 1591년(선조 24) 좌의정 정철(鄭澈)이 선조에게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할 것을 건의하자, 정철 등이 신성군(信城君)을 해치려 한다고 인빈 김씨를 통해 선조에게 고하게 했다. 선조는 정철과 윤두수(尹斗壽) 등 서인(西人)을 파직하고 유배하였으며(건저의사건), 세자 책봉을 미루어 신성군을 총애하고 있음을 드러냈다.

하지만 1592년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 도성을 비우고 피난을 가는 처지가 되자 선조는 어쩔 수 없이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였다. 그리고 신성군은 동생인 정원군(定遠君) 이부(李琈)와 함께 먼저 평안도로 보냈으며, 기성부원군(杞城府院君) 유홍(兪泓)과 이조참판 이항복(李恒福)으로 하여금 이들을 수행케 했다. 그 뒤 신성군은 선조와 함께 북상하는 왜군을 피해 영변(寧邊)을 거쳐 의주(義州)로 피난을 가다가 1592년 12월 8일(음력 11월 5일) 사망했다.

신성군은 의주에 매장되었다가 임진왜란이 끝난 뒤인 1600년(선조 33년)에 도성의 왕실 묘역으로 옮겨졌다. 오늘날 신성군의 묘는 어머니인 인빈 김씨가 매장된 순강원(順康園)에 있다. 신성군은 1604년 선조의 의주 피난길을 따랐던 사람들에게 주어진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으로 포상되었으며, 고종(高宗) 때인 1871년(고종 8)에 충정공(忠貞公)이라는 시호를 추증 받았다.

역참조항목

안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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