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니트 브레즈네프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 Leonid Il'ich Brezhnev ]

요약 소련의 정치가. 1970년대 데탕트 설계의 주역으로 동서 긴장완화에 미친 공로는 적지 않다. 집권기간 중 미·소 군사력의 균형을 가져왔고 계속된 동유럽의 자유화 운동과 탈소 노선을 추구하는 유로코뮤니즘의 대두, 국내의 반체제운동 때문에 곤혹을 겪었다.
출생-사망 1906.12.19 ~ 1982.11.10
국적 소련
활동분야 정치
주요저서 《레닌주의적 노선에 관하여 On a Leninist Course》(1970)

스탈린 이후 최장기인 18년 동안 소련을 통치하였다. 금속세공인의 아들로 태어나 1931년 공산당에 입당한 후, 1935년에 도네프로젠스키 야금대학을 나왔고 제2차 세계대전에는 정치장교로서 참전하였다. 1946∼1947년에 자포노레주(州)당 제1서기가 된 이후, 여러 당직을 거쳐 1956∼1960년에 당중앙위원회 서기(書記), 1960년 최고회의간부회 의장을 맡았다. 1964년 10월 14일 흐루쇼프가 그의 내정(內政), 특히 농업정책의 실패로 당중앙위원회에서 물러나자, 그 뒤를 이어 당 제1서기직에 올랐다. 그의 시대는 크게 두 시기로 나뉜다.

1965∼1970년의 제1단계는 브레즈네프(당 제1서기), 코시긴(수상) 및 포드고르니(최고회의간부회 의장)의 집단지도체제였으나, 1970년 이후 제2단계에서는 점차 실질적인 1인 지배체제를 구축하고 안정된 권력을 구사하였다. 그는 통치기간 동안 극적인 정책변화를 피하며 지도적 당간부의 지위안정화를 도모하여 당내의 갈등을 최소한으로 줄였으나, 그 결과 그의 집권 말기에는 정치국 정위원 평균연령이 70세에 이르렀다. 1977년 6월 포드고르니의 후임으로 국가원수직인 소련최고회의간부회 의장직도 맡아, ‘도전받지 않는 지도자’로서 권력지위를 굳혔다. 그리고 같은 해 10월 ‘브레즈네프 헌법’이라 불리는 새 헌법을 발효하여 브레즈네프 체제를 완전히 굳혔다. 브레즈네프도 그의 전임자들과 마찬가지로 외교정책의 기본적인 목표를 혁명기지로서의 소련의 국익(國益) 보호와 확대에 두었다. 그러나 1970년대의 데탕트 설계의 주역으로서 동서 긴장완화에 미친 그의 공로는 적지 않았다.

그는 집권기간 동안 미국과의 군사력 균형에 크게 관심을 두어, 상대적으로 미국에 크게 열세였던 대륙간탄도탄(ICBM)과 해 ·공군력을 대폭 증강시킴으로써 미 ·소 군사력의 균형을 가져왔다. 아울러 아프리카 및 중남미에 대한 계속적인 영향력 확대, 다원화(多元化)되는 공산세계 속에서의 종주권(宗主權) 고수 등 소련의 입장에서 볼 때 적지 않은 성과를 올렸다. 또한 브레즈네프는 1971년 소련공산당 제24차 대회에서 6개조의 평화안을 제안하여, 전유럽안보회의 개최를 촉구하였다. 이 제안은 1975년 7월 30일 헬싱키선언이 조인됨으로써 결실을 맺었다. 여기서 결정된 사항은 유럽의 현재 국경선 및 분단상태의 고정화를 바탕삼아 평화정책 ·상호교류를 확대하자는 것이었다. 그는 그후 전세계의 관심을 끌었던 SALT(전략무기제한협정) I ·II를 타결함으로써 미국과의 협력관계를 더욱 다졌다.

그러나 그는 데탕트의 노력 속에서도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의 고수, 소련의 국가이익추구 및 자국 내의 반체제운동 탄압 등 기득권(旣得權) 보장과 체제유지를 위해서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는 단호함을 보였다. 1968년 8월 체코슬로바키아가 독자적인 ‘사회주의의 길’을 추구하자, 이른바 브레즈네프독트린으로 알려진 ‘제한주권론’을 내세우며 무력저지를 강행하였다. 1978년에는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고, 1980∼1981년에는 폴란드 사태에 우회적으로 개입하는 등 치열한 대국주의적 이기주의를 나타내었다. 그러나 브레즈네프는 그의 집권시기 중 계속된 동유럽의 자유화운동과 탈소(脫蘇) 노선을 추구하는 유로코뮤니즘의 대두, 계속되는 국내의 반체제운동 때문에 적지 않은 곤혹을 겪었다.

1970년 《레닌주의적 노선에 관하여 On a Leninist Course》라는 연설문집 2권을 출판하였으나, 공산주의 교의상(敎義上)에 커다란 변화를 시도하지는 않았다. 다만 당의 주도적 역할과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및 긴장완화 등의 개념을 새롭게 정리하였다는 점이 지적될 수 있다. 18년간의 장기집권에도 불구하고, 개인숭배형 독재자의 영상(映像)을 남기지 않고 체제의 안정화를 구축하였다는 것이 주요한 특징으로 부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