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회빈 강씨

민회빈 강씨

[ 愍懷嬪姜氏 ]

요약 본관 금천(衿川). 우의정 강석기(姜碩期)의 딸이다. 1627년(인조 5) 가례(嘉禮)를 올려 소현세자빈이 되었다. 병자호란 뒤인 1637년 세자와 함께 인질로 심양(瀋陽)에 잡혀갔다가 1645년 귀국하였다.
출생-사망 1611 ~ 1646
본관 금천(衿川)

병자호란 때 소현세자와 함께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으며 심양에 머무는 9년 동안 경영수완을 발휘해 국제무역과 농사로 많은 재산을 축적하였다. 당시 청나라는 식량부족에 시달렸고 유목을 주로 하는 민족이었기 때문에 농사에 대한 지식이 없었다. 세자빈 강씨는 조선에서 노예로 잡혀온 사람들을 동원하여 농사를 지어 많은 이익을 남겼다. 하지만 인조는 심양에서 소현세자와 세자빈이 청나라 고관들과 원만한 관계를 형성하고 친청적 입장을 취하자 청나라가 소현세자를 즉위시키고 자신을 몰아낼 것이라고 의심하기 시작했다. 1643년(인조 21) 세자빈 강씨의 부친 강석기가 사망하자 심양에서 잠시 귀국하였으나 인조의 견제로 왕곡(往哭)을 하지못하고 돌아갔다. 소현세자는 귀국 후, 청나라에서의 행실을 문제삼아 인조의 학대를 받았고 갑자기 급사하였다.

세자가 죽은 뒤 세자빈 강씨는 인조가 꾸며낸 모살계획에 계속 시달리다가 감금되었다. 그해 인조에게 총애를 받던 소용(昭容) 조씨(趙氏)의 무고로, 조씨 저주사건의 주모자 및 임금의 음식에 독약을 넣었다는 죄목을 받았다. 1646년 인조의 억지로 세자빈 강씨는 폐출되었고 그날 사약을 받고 사사(賜死)되었다. 이어 어린 세 아들은 제주도로 귀양가 사망하였고, 노모와 4형제는 모두 처형되거나 장살(杖殺)되었다. 1718년(숙종 44) 혐의를 벗고 세자빈에 복위되었다.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간 신세지만 실의에 빠지지 않고 새로운 문물과 실용주의에 눈뜬 여인으로 높이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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