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집

김집

[ 金集 ]

요약 조선 중기의 문신. 아버지(김장생)와 더불어 예학의 기본적 체계를 완성하였다.
김집 선생 묘

김집 선생 묘

출생-사망 1574 ~ 1656
본관 광산
사강
신독재
시호 문경
활동분야 정치
주요저서 《신독재유고》《의례문해속》

본관 광산. 자 사강(士剛). 호 신독재(愼獨齋). 시호 문경(文敬). 김장생(金長生)의 아들. 한양에서 출생하였으며 송익필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혔으며 그의 영향으로 장성하여 예학을 중시하였다. l8세 때 진사가 되었다. 1610년(광해군 2) 헌릉참봉(獻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광해군과 북인이 주도하는 현실외교정책과 대동법시행 등 정치적 이념을 달리하여 아버지(김장생)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서인이 주도하는 인조반정으로 왕위를 찬탈하자 다시 등용되어 부여현감이 되고, 이어 임피현령·지평(持平)·집의(執義)·공조참의(參議) 등을 역임하였다.

인조 중기에 공서파(功西派)가 집권하자 퇴직하였다. 효종이 즉위하여 공서 김자점(金自點) 등이 파직되자, 김상헌(金尙憲) 등과 함께 등용되었다. 예조참판·대사헌을 거쳐 이조판서가 되었고 산당의 영수가 되어 정치적 역할과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대동법 시행을 주장하는 한당의 영수 김육(金堉)과 대립하여 지방의 특산물을 바치는 공납제도는 오히려 백성의 충의 발현이며 백성으로서 예을 실천하는 것이라는 명분을 내세웠다. 대사헌 ·좌찬성(左贊成)을 지내고 중추부판사로 재임 중 사망하였다. 만년에 예학(禮學) 연구에 집중하여 아버지 김장생과 더불어 예학의 기본적 체계를 완성하였고 송시열이 그의 수제자이다.

1883년(고종 20)에 영의정이 추증되고, 문묘(文廟)와 효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연산의 돈암서원(遯巖書院), 임피의 봉암서원(鳳巖書院), 봉산의 문정서원(文井書院), 부여의 부산서원(浮山書院), 광주(光州)의 월봉서원(月峯書院) 등에 향사되었다. 문집에 《신독재유고》, 편서에 《의례문해속(疑禮問解續)》이 있다.

김집 연보
출생 1574~ 사망 1656

1574

김장생의 아들로 한양에서 출생.

1591

진사시에 합격.

1610

헌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당시 정치 방향과 이념을 달리하여 고향으로 돌아감.

1649

이조판서를 지냄.

1654

판충부사에 임명.

1656

사망.

1883

영의정에 추증되고 문묘와 묘정에 배향 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