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드슨

허드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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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565경, 잉글랜드
사망 1611. 6. 22 이후
국적 잉글랜드, 영국

요약 영국의 항해가·탐험가.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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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2. 북동항로 탐사
  3. 허드슨 만으로의 항해
허드슨(Henry Hudson)
허드슨(Henry Hudson)

개요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북극항로를 찾기 위해 영국(1607, 1608, 1610~11)과 네덜란드(1609)의 4차례 탐험에 참가했다.

북아메리카의 허드슨 강·해협·만은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된 것이다(캐나다).

허드슨의 초기생애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그를 후원하던 런던의 머스코비사(社)는 그의 전세대에 속하는 허드슨이라는 이름의 몇몇 탐험가들과 이미 관계를 맺고 있었다. 북서항로를 찾아 최초로 북극해를 항해했던 영국의 항해가 존 데이비스는 현재 런던 이스트엔드의 선창가에 해당하는 라임하우스에 있는 토머스 허드슨의 집에서 1585년 탐험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이 자리에 참석했던 헨리 허드슨은 깊은 인상을 받고 이후로 일생 동안 북극해 탐험을 시도하게 되었다. 그는 북극 지리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을 뿐 아니라 항해기술도 뛰어났기 때문에 머스코비사와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는 그를 위험한 탐험여행의 지휘자로 결정했다.

북동항로 탐사

1607년 봄 머스코비사의 후원으로 허드슨, 그의 아들 존 및 다른 10명의 선원들이 '일본·중국으로 통하는 북극항로를 찾기 위해' 출항했다.

허드슨은 북극 주위에서 겨울에도 얼지 않는 바다를 찾을 수 있으리라 믿고 북쪽으로 항해했다. 북극의 부빙군(浮氷群)을 만나자 그는 빙산을 따라 동쪽으로 진행하여 스발바르(스피츠베르겐) 제도에 도착했다. 그는 북동항로를 발견하려 했던 16세기 네덜란드의 해양탐험가 빌렘 바렌츠가 항해한 이곳을 지나 항해를 계속했다.

1년 뒤 머스코비사는 그에게 바렌츠 해 동쪽의 스발바르와 노바야젬랴 제도 사이를 경유하여 다시 한번 북동항로를 찾도록 요청했다. 그러나 극지방의 빙원에 가로막혀 영국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영국에 귀환한 허드슨은 얼마 뒤 암스테르담으로 가서 이번에는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와 계약을 맺고 3번째의 북동항로 탐험을 떠나기로 했다. 여기서 그는 북아메리카를 경유하여 태평양에 이르는 2가지 경로가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하나는 영국의 탐험가 조지 웨이머스 선장이 1602년의 항해일지에 기록한 것으로 북위 62° 부근에 있는 경로였고, 다른 하나는 영국의 군인이자 탐험가이며 식민지 개척자인 존 스미스 선장이 식민지인 북아메리카 버지니아에서 알려온 것으로 북위 40° 부근에 있는 경로였다. 허드슨은 북서항로를 발견하고 싶은 마음이 컸으나 북동쪽으로의 항해가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면 곧장 네덜란드로 돌아오기로 동인도회사와 약속했다.

허드슨은 1609년 4월 6일 네덜란드를 출발했다.

심한 맞바람과 폭풍으로 인해 북동쪽으로 항해를 할 수 없게 되자 그는 애초의 약속을 깨고 대신 북서항로를 찾도록 선원들에게 제안했다. 귀환할 것이냐 항해를 계속할 것이냐를 놓고 논의하던 선원들은 결국 스미스 선장의 제안에 따라 북위 40° 부근에서 북서항로를 찾기로 결정했다. 대서양 연안을 항해하던 허드슨은 장엄하게 흐르는 큰 강을 발견했다. 원래 이 강은 1524년 피렌체의 해양탐험가 조반니 다 베라차노가 발견한 것이었으나 이때부터 허드슨 강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 강을 따라 약 240㎞를 올라가서 뉴욕 주 올버니 근처에 이르렀을 때 그는 이 강이 태평양으로 흐르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네덜란드로 돌아가는 길에 허드슨은 영국의 다트머스에 닻을 내렸는데, 이때 영국 정부는 그와 다른 영국인 선원들에게 다른 나라를 위해 항해하는 일을 그만두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그의 항해일지와 서류가 네덜란드로 보내졌기 때문에 그가 항해 도중 발견한 사실들은 곧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때부터 허드슨은 웨이머스가 기록한 항로를 따라 북아메리카로 출발할 준비를 했다. 웨이머스는 자신의 항해일지에서 간조 때마다 '거친 파도'가 일며 바닷물이 빠져나가는 작은 만(지금의 허드슨 해협)을 묘사했는데, 이러한 현상은 그 해협 너머에 큰 바다가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허드슨은 이것을 태평양으로 확신했다. 영국의 동인도회사가 그의 항해에 300파운드를 기부했으며, 머스코비사도 비슷한 금액을 내놓았다.

그밖에도 5명의 귀족과 13명의 상인이 허드슨의 탐험 여행을 후원했다.

허드슨 만으로의 항해

1610년 4월 17일 55t급의 '디스커버리호'를 타고 런던을 출발한 허드슨은 아이슬란드에 잠시 정박한 뒤 웨이머스가 묘사한 해협을 향해 항해했다.

이곳을 지나 허드슨 만으로 접어든 그는 서쪽으로 향하는 대신 동쪽 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항해했다. 그러나 허드슨 만 남단에 있는 제임스 만에 이르러 태평양으로 빠져나가는 길을 찾지 못한 일행은 겨울이 올 때까지 바다 위를 정처없이 떠다니게 되었다. 북극에서 겨울을 맞게 되자 선원들간에 불화가 일어났다. 그러는 동안 허드슨이 처음에는 헨리 그린이라는 선원에게 회색 겉옷을 주었다가 그가 자기를 불쾌하게 하자 그 옷을 돌려받아 다른 사람에게 주어버리는 일이 생겼다.

일부 선원들은 허드슨이 아끼는 사람들을 위해 식량을 감추고 있을 것이라고 의심하게 되었는데, 그가 여분의 식량을 찾아내기 위해 선원들의 개인 사물함을 뒤지도록 명령하자 선원들의 불만이 폭발하게 되었다.

허드슨에게 강등을 당한 로버트 주엣이라는 선원이 그린 등과 함께 반란을 공모했다. 1611년 6월 22일 영국으로 귀환하던 도중 이들은 허드슨과 그의 아들, 그리고 7명의 선원들을 붙잡아 작은 보트에 태우고 허드슨 만 근처의 바다에 떨어뜨렸다. '디스커버리호'는 영국으로 돌아왔으나, 배에서 반란을 주도했던 사람들은 에스키모와의 싸움에서 다른 선원들과 함께 모두 살해되었다.

1631~32년 허드슨 일행이 지은 것으로 보이는 은신처의 잔해가 발견되기도 했으나 그들의 행방에 대한 다른 소식은 전혀 없었다.

지휘자로서의 허드슨은 용감하다기보다는 고집이 센 편이었다. 그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와의 약속을 깼을 뿐 아니라 1611년 그의 선원들이 일으킨 반란을 진압하는 데도 실패했다. 그는 자기 마음에 드는 선원만을 아끼고 전체의 사기가 저하되는 것에는 무신경했다.

더욱이 제임스 만에 갇히게 되면서부터 그는 우유부단하게 행동했다. 그러나 그는 매우 위험한 탐험을 4번이나 시도했고, 북극의 겨울 속에서도 선원들을 훌륭히 지휘했으며, 위치도 알 수 없는 해안에서 빙하에 좌초될지도 모르는 배를 끝까지 지켰다. 그는 베라차노·데이비스·바렌츠 등의 탐험 결과를 실질적으로 발전시켜 새로운 성과를 이룩했다. 그가 지리학적 지식에 끼친 영향은 매우 컸으며, 이후 네덜란드와 영국은 그가 발견한 사실을 토대로 각각 허드슨 강 유역과 캐나다 지역에 식민지를 세울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