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

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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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중국어를 표기하는 중국 고유의 문자.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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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육서
  2. 역사
  3. 전승
  4. 한자가 미친 영향
  5. 한국의 한자
한자(漢字)
한자(漢字)

한자는 현대까지 사용되고 있는 유일한 고대문자이다. 한자를 보통 표의문자로 분류했는데 표의문자라는 단어는 문자가 직접 관념과 결합된다고 오해되기 쉽기 때문에, 최근에는 그대신 표어문자라는 단어가 사용된다. 표어문자는 원칙적으로 하나의 문자가 하나의 말을 나타낸다. 한자는 이 원칙에서 보면 가장 전형적인 표어문자이다. 표음문자는 의미가 없는 글자가 모여 어떤 말을 나타내지만, 표어문자는 각 글자마다 그 자신의 의미가 있으며, 각각 '자어'를 이룬다.

육서

한자는 중국어의 단어를 표시하는 문자로서 탄생했는데, 그 한자의 형성은 일반적으로 육서의 방법에 의해 분류될 수 있다. 6서란 지사·상형·회의·형성·전주·가차의 6가지 유형을 가리킨다.

지사·상형은 기본적인 단체문자이다. 상형은 '人'·'馬'처럼 구체적인 사물의 형태를 본뜬 문자이며, 지사는 '一'·'二' 또는 '下'처럼 구체적인 형상으로는 묘사할 수 없는 수나 공간적인 관계를 가리키는 문자이다. 상형·지사의 두 원리로 한자의 기본적인 문자가 만들어졌다. 이 기본자의 결합방식으로 회의·형성 문자가 만들어졌다. 회의는 어떤 말을 나타낼 경우, 그 말의 의미를 2가지 또는 그 이상의 기본자를 결합시켜 표시하는 방법이다. 전주·가차의 방법은 실제로는 조자의 방법이 아니며, 기성문자의 운용방법이다. 따라서 엄밀히 말하면 한자생성의 원리는 상형·지사·회의·형성의 4가지뿐이라고 할 수 있다.

이중 형성을 제외한 3가지 원리로 만들어진 문자는 숫자가 매우 제한되어 있으며, 이 3가지 방법으로 모든 중국어의 단어를 표시할 수는 없었다. 이에 따라 기성의 문자를 본래의 뜻과는 다른 말에 적용하는 방법이 자연스럽게 생겨났다. 그 적용법이 바로 전주와 가차인데, 적용이 의미의 유사성에 의해 이루어진 경우가 전주이고, 음운의 유사성에 의한 경우가 가차이다. 전주나 가차는 1자 1어의 원칙을 어지럽히는 동자이어의 출현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 모호성을 피하기 위해 식별의 부호를 덧붙이는 방법이 발명되었다.

이를테면 '支'는 '분기'의 의미를 공유하는 몇 가지 말, 즉 '사지'·'가지'[枝]·'지류' 등을 표시하는 데 사용되었다. 이것들은 동일한 말의 의미를 분화시켰지만, 그 의미분화를 명확하게 하기 위해서, '月(肉)·木·氵(水)'의 문자를 덧붙여 '肢·枝·汥'의 문자를 만들었다. 이처럼 뜻을 표시하는 부분과 의미의 범주를 표시하는 부분을 결합시키는 형식이 발명되었는데, 이것을 형성문자라고 한다. 이 방법은 편리하기 때문에, 많은 한자가 이 형성원리에 의해 만들어졌다.

역사

갑골문(甲骨文)
갑골문(甲骨文)

한자의 가장 오래된 기록은 BC 1500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허난 성[河南省] 안양[安陽]의 은(殷)왕조의 옛 도시 유적에서 출토된, 이른바 은허문자(殷墟文字)는 거북등딱지와 짐승뼈에 새겨진 복사의 명문이라는 점에서 '갑골문'이라고 불린다. 이 갑골문의 문자도 이미 관습화되어 있어, 한자의 참된 원시형태는 아니다.

이미 은대에 새겨진 청동기 명문이 알려지고 있지만, 청동기의 명문은 이어지는 주(周)왕조시대의 것 가운데에도 훌륭한 것이 남아 있는데, 이들 명문을 '금문'이라고 부른다. 아쉬운 점이라면 많은 청동기가 과학적인 발굴을 거치지 않고 출토되었기 때문에, 갑골문보다 오히려 연대가 불확실한 것이 많다는 점이다. 원래 한자는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고대문자처럼 특권계급이 전유하고, 다분히 '제정적'(帝政的)인 것이었다. 따라서 초기에는 왕의 독점으로 제한되어 있었지만, 차츰 제후와 귀족이 사용하게 되었다. 서주의 청동기 대부분은 그같은 귀족이 만든 것이다. 동주시대가 되면 주왕조의 권력이 약화되어 각국 제후의 저택이 각 지방의 문화적 중심을 이루었고, 문자의 전승도 분열되었다. 그결과 자형과 용법에서도 지방적 차이를 낳았다. 〈설문 說文〉에 기록되어 있는 고문과 주문은 선진시대 지방적 차이의 계통을 이어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 새겨진 물건에 따라 글자체의 변화된 모습도 발견되었다.

진(秦)의 시황제(始皇帝)는 6국을 멸하고 천하를 통일한 후 도량형의 통일과 함께 문자의 통일을 꾀했다. 그것은 진에 전해진 문자에 기초한 것으로, 이를 소전(小篆)이라고 한다. 이 글자체는 오늘날에도 인장의 전각에 사용되고 있다.

문자의 사용이 점차 위에서 아래로 침투됨에 따라 회화적 또는 도형적인 글자 모양은 간략화되었으며, 그중 서기들이 사용하는 사무적인 글자체가 한대에 이르러 예서(隸書)가 되었다. 이 예서로부터 후세의 초서(草書)·해서(楷書)·행서(行書)가 발전되어왔다.

예서(隸書)
예서(隸書)

전승

시황제가 행한 '분서갱유'의 대탄압은 문자의 전승에 중대한 영향을 주었다. 그것은 한(漢)으로 넘어오면서 경학의 금고문설을 낳는 기반이 되었다. 오늘날 선진시대의 경전과 제자의 서적 원형을 복원하는 방법은 분명히 없지만, 시황제의 탄압과 문자통일로 인해 문자의 전승에 하나의 단절을 낳았다고까지 생각되고 있다.

선진시대의 문헌이 지니고 있는 대부분의 문제는 진의 문자개혁을 경계로 하는 문헌의 전승에 깊이 관련되어 있다. 한대의 경학 연구의 발전과정에서 후한의 허신(許愼)에 의해 〈설문해자 說文解字〉가 편찬되었지만, 이것은 중국 문자학의 출발점이며, 또 소전 이전의 문자를 해명할 수 있는 기초가 되는 것이다.

물론 당시 이미 각 한자 형식의 참모습은 전해지지 않고, 허신의 해설에는 자주 견강부회하는 점이 보이기는 하지만, 이 〈설문해자〉의 존재에 의해 옛 문자의 구성을 추측할 수 있으며, 〈설문해자〉가 없었다면 금문이나 갑골문도 해독하기가 매우 곤란했을 것이다.

한자가 미친 영향

한자의 역사는 그대로 중국의 역사이다. 3,500년을 상회하는 한자의 생명은 중국의 주변에 거주하는 이민족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중국문화의 전파는 북동쪽과 남쪽에 현저하게 퍼졌지만, 그 결과 '한자문화권'이 생겨났다. 그중에서도 한국·일본·베트남에 한자의 뿌리를 내렸으며, 오늘날 한국과 일본에서 각각 특유한 방법으로 사용되고 있다.

중국에 인접한 여러 민족은 많건 적건 중국문화의 영향을 받고 있지만, 한자를 사용하지 않는 민족도 있고, 또 자국 특유의 문자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 고유의 문자도 한자와 전혀 관계없이 만들어진 것이 아니며, 한자의 자극에 의해 또는 그것에 대한 반동으로서 만들어진 것이다.

한자를 처음 접한 민족에게 한자는 극히 한정된 지식인 사이에서만 알려졌다. 지식인 중에서도 소수, 즉 중국인과 똑같은 교양을 가지고, 중국인과 똑같이 중국어를 썼던 사람이 한자를 사용하고 한문을 썼던 것이다. 한국의 경우 신라의 최치원(崔致遠) 등이 그 전형적인 예이다.

이 단계에서 한자는 그 민족이 말하는 언어와는 관련이 없는 존재이다. 그러나 자국의 것을 기록하고 자기의 감정을 토로하는 데 정통한 한어·한자로 모두 기술할 수 없지만, 최소한 지명·인명 등의 고유명사를 한자로 기록할 필요성이 생겼다. 이 고유명사의 표기는 한자 표음 사용의 싹이기도 하다.

한국·일본·베트남 3개국은 오래도록 한자문화권 안에 있었기 때문에, 한자체계가 그대로 이식되어 각각 고유한 방법으로 사용되어왔지만, 어떤 나라에서건 한자는 토착어의 음운에 적응한 한자음으로 읽고 있다. 이 한자음의 전승방법은 각각 다르다.

같은 한자문화권 안에 있던 북방의 여러 민족, 거란·여진·서하 등은 각각 고유의 문자를 고안했다. 거란과 여진 문자는 현재 해독되지 못하고 있으며 그 형성에 관해서는 불투명하지만, 한자를 모방하면서도 한자와는 완전히 성격을 달리하는 표음문자일 것으로 여겨진다.

서하문자는 이미 해독되었지만, 문자의 자형은 한자와는 별개의 것이더라도 그 형성원리는 거의 한자 형성원리의 준용 또는 그 발전이다. 한국이나 이들 여러 민족이 한편으로 한자와는 완전히 관계없는 문자를 만들어냈는데, 이는 한자의 자극을 받은 한편, 한자에 대한 반동으로서 고유문화의 주체성을 주장하며 독자적으로 문자 고안을 창조했던 것이다.

한국의 한자

국어 어휘의 60% 이상을 차지하는 한자어는 고조선 말기에 우리나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는 한자와 한문으로 문자생활을 영위한 결과로, 한자어 침투는 지리적 특성에 따라 고대의 삼국 가운데에서도 고구려·백제·신라의 순으로 된 것으로 보인다. 광개토대왕비를 보면 414년 고구려에서는 이미 중국어의 영향을 많이 받았음을 알 수 있다.

그 한 예로 왕의 칭호에 추모왕(鄒牟王)처럼 모두 왕(王)자를 붙인 것을 들 수 있다. 그후 757년(경덕왕 16) 전국 군현의 이름을 중국식을 본떠 한자 3자로 고치게 되면서 인명까지 한자로 짓는 풍조가 생겨났다. 한자어의 본원은 중국의 문어이다. 한국에는 중국어 회화를 할 수 있었던 사람은 거의 역관들뿐으로 글로 쓰는 한문만 존재하고 입으로 말하는 중국어는 존재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한자로 적을 수 있는 모든 단어를 한자어라고 광의의 개념으로 이해할 때, 모든 한자어가 중국에서 들어왔다고 볼 수는 없다. 중국을 통해서 들어온 한자어 가운데는 중국의 고전에서 비롯된 것, 중국을 경유한 불교의 경전에서 비롯된 것, 그리고 중국의 구어인 백화문에서 나온 것 등이 있다. 또한 한자어 중에는 이두에서 온 것들이 있음이 특이한데 '사연'(辭緣)·'절차'(節次)·'행차'(行次)처럼 오늘날까지 쓰이고 있는 것도 있다.

19세기 말엽 서양문물이 들어오면서 한자어에도 큰 변화가 일어났다. 초기에는 중국으로부터 '자명종'(自鳴鍾)·'천리경'(千里鏡) 등의 단어를 받아들였고, 과학·종교와 관련된 단어들도 중국에서 만들어져서 한국으로 들어왔다. 19세기의 마지막 10년 동안에는 서양문물에 관한 단어들이 일본으로부터 들어왔는데 일본에서 새로 만든 한자어가 많았다.

예를 들면 중국어에서 들어온 '화륜선'(火輪船)·'화륜차'(火輪車) 등이 일본에서 들어온 '기선'·'기차'(汽車) 등으로 대체되었다. 일본에서 서양의 학문과 문화를 수용하면서 많은 번역어를 한자어로 만들었기 때문에 일본어 어휘에 한자어가 급격히 늘어났다. 그 대부분은 중국 고전의 지식으로써 만들었기 때문에 한국에서도 통용될 수 있었고 이것이 국어의 한자어 증가에 한 원인으로 작용했다. 그밖에 한국에서 독자적으로 만든 단어들도 있는데 '고생'(苦生)이나 '도령'(道令) 등을 들 수 있다. 한자어는 차용어와 구별이 쉽지 않다. 차용어 가운데 발음이 한국 전통적 한자음과 동일한 경우에는 그대로 한자어로 편입되었고, 서로 발음이 다른 경우에는 그 차용어의 본래 한자를 우리나라 한자음으로 읽으려는 경향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국어에 대한 중국어의 압도적인 영향을 상징하는 한자어는 국어어휘에 있어서 고유자산인 고유어보다 훨씬 많은 수를 차지한다. 따라서 한자어는 국어와 국자 문제의 중심을 이루는데, 한자어와 고유어는 서로 조화를 이루고 역할을 분담하는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한문학, 한자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