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각

전각

다른 표기 언어 seal cutting , 篆刻

요약 도장은 일반적으로 전서를 사용하며, 글자를 쓴 후 새기기 때문에 전각이라 한다. 금속 도장은 먼저 도장의 모양을 새긴 후 주조한다. 수정과 옥 도장은 고대에는 손으로 깎아 만들었으나, 오늘날에는 금강사로 깎아내므로 전각이라 한다.
진의 통일 후 황제의 도장을 새라 하고, 관청이나 개인의 것을 인이라고 했으며 한·위진시대의 도장은 한인이라 한다. 당·송대 이후에 도장학이 발달하였고 수대에 이르러서야 관인이 커지기 시작했다.
한국에서 전각이 출현한 시기는 도장이 사용되기 시작한 고려시대라고 볼 수 있으며, 조선으로 전승되어 동인·철인 등이 만들었다. 숙종 때의 허목이 유명하다.

전각
전각

도장은 일반적으로 전서(篆書)를 사용하며, 먼저 글자를 쓴 후 새기기 때문에 전각이라고 한다.

금속 도장은 먼저 도장의 모양을 새긴 후 주조한다. 수정과 옥 도장은 고대에는 손으로 깎아 만들었으나, 오늘날에는 금강사(金剛砂)로 깎아내므로 전각(電刻)이라 한다. 돌·상아·뿔 등의 도장은 모두 칼로 깎아 만든다. 도장을 옛날에는 엽(鉩 또는 이미지)이라 불렀으며 중국 전통예술의 하나였다. 그 기원은 아주 오래되었고, 옛 토기나 청동기 위에 찍혀 있는 무늬나 문자가 도장의 시초이다.

계급사회가 시작된 이후 도장은 권문세가의 증표가 되었고, 사람들 사이에 주고받는 믿음의 징표가 되었다.

선진시대(先秦時代)에는 새(璽)·술(鉥)이라고 통칭되었다. 이 술에 씌어진 글자는 당시 6국의 전서로, 그 풍격이 기이하고 형식도 다양했으며, 진전(秦篆)이나 갑골문(甲骨文)과는 달랐다. 진(秦:BC 221~206)이 천하를 통일한 후 황제의 인신(印信)을 새라 불렀고, 관청이나 개인이 사용하던 것을 인(印)이라고 불렀다.

진대 도장의 글자체는 대체로 소전(小篆)을 사용했으며, 특히 음각으로 새긴 도장은 글자의 필획이 가지런하고 단조롭지 않으며, 네모나면서도 둥근 맛을 갖추고 있어 아름답고 고운 풍격을 갖추었다.

한·위진시대(漢魏晉時代:BC 206~AD 420)의 도장은 일반적으로 한인(漢印)이라고 부른다. 전한 때는 도장을 그리 많이 새기지는 않았으나, 인꼭지의 형식은 퍽 복잡했다. 전서의 글자체는 4각으로 바르고 곧으며, 엄밀하게 구성되어 있다.

신(新)나라 때는 조각기술이 더욱 정교해졌다. 어떤 개인 도장은 금도금을 한 것도 있다. 관인(官印)은 전한에 비해 작았다. 후한의 도장 재료로는 금·은·옥·구리·유리 등이 쓰였고, 형태는 정4각형·직4각형·원형 등이 있었다. 개인 도장은 주로 음각을 많이 썼으나, 간간이 양각과 음각을 섞어 쓴 것들도 있다. 채색은 2가지 혹은 3가지로 하며, 일반적으로 주조할 때 짐승 또는 거북 모양의 인꼭지를 만든다. 큰 도장은 중간이 텅 비어 있어 작은 도장을 그 속에 집어넣었는데, 모양이 마치 어미가 자식을 품고 있는 것과 같아서 자모인(子母印)이라고 부른다.

도장에 새기는 글은 이름과 상서로운 말 이외에도 인물·거마(車馬)·조수(鳥獸) 등을 새겨넣기도 하므로 상형인(象形印) 혹은 도안인(圖案印)이라고 부른다. 위진시대에는 한대를 이어받아 문자 구성에 있어 나름대로 격식을 갖추었는데, 필획은 섬세하며 배치는 자유로웠다. 개인 도장 가운데 현침인(懸針印)이라는 것이 있는데, 끝이 가늘고 뾰족하다. 모양이 마치 올챙이 같다 해서 지어진 이름이며, 일설에는 후한의 조희(曹喜)가 만들어낸 것이라고 한다.

남북조시대에는 凸자 모양의 6면 도장이 유행했는데, 위에 도장 손잡이를 만들어 그 끝에 작은 도장을 넣었다.

당·송대(唐宋代:618~1279) 이래로 도장학은 더욱 발달하여 각각 그 시대의 특색과 풍격을 지녔으며, 수대(隋代)에 이르러서야 관인이 커지기 시작했다. 당대에는 예서(隸書)를 도장에 새기기 시작했고, 송대에는 화압인(花押印)이 만들어졌는데, 이는 테두리가 없고 화압이 매우 복잡하여 모방하기가 쉽지 않았다.

금(金)나라는 대체로 한문의 전서를 사용했으나, 여진(女眞) 문자도 도장에 사용했다. 서하(西夏)의 도장에 새겨진 글자는 주로 서하의 전서를 사용했고, 모양은 둥글고 테두리를 각지게 만들어 나름대로 특색이 있 었다.

원대(元代:1279~1368)에는 화압인이 성행했다. 도장 윗면에는 해서로 성씨를 새기고 아랫면에는 파스파 문자를 새겼으며, 원압(元押) 또는 원착(元戳)이라고 부른다. 원대의 화가 왕면개(王冕開)는 화유석(花乳石)을 도장의 재료로 썼는데, 새기기에 편리했기 때문에 명·청대(明淸代:1368~1911)의 사대부들에게 널리 유행했고, 이로 인해 도장학의 유파는 더욱 늘어나 여러 명가들을 배출했다.

예를 들어 명대 환파의 창시자 하진(何震)은 오로지 진·한의 전각을 익혔으며, 그 풍격은 소박하면서도 아름다웠다. 휘파(徽派)의 왕관(汪關)·정수(程邃) 등은 한대의 것을 모방했는데 거의 진짜와 다름없었다. 포전파의 송각(宋珏)은 팔분체(八分體)를 도장에 새겼으며, 풍격이 청아했다.

여러 사람의 풍격을 고루 갖추고 있는 사람들을 통칭하여 절파(浙派)라 한다. 절파는 건륭연간(乾隆年間:1736~95)에 정경(丁敬)이 창시했으며, 이를 이어받은 사람으로는 장인(蔣仁)·황역(黃易)·해강(奚岡)·조지침(趙之琛)·전송(錢松) 등이 있다. 그들은 진한을 종법으로 삼았으며 칼로 새기는 것에 능했고 어느 특정한 서체에 얽매이지 않았으며 나름대로의 특징을 갖추고 있었다. 정경 등 8명이 모두 항저우[杭州] 사람이라 서령8가(西泠八家)라고 부르기도 하며 예리한 기법으로 환파의 기풍을 일변시켰다.

만청(晩淸) 이후에는 조자겸(趙子謙)이 도자기·비단·기와 등에 씌어졌던 문자를 도장에 많이 이용하기 시작하여 또다른 일군이 나왔다. 우창숴[吳昌碩]는 석고문(石鼓文)의 필법을 도장에 인용하여 필력이 웅건하며 기세가 중후한 풍격을 이루었다. 치바이스[齊白石]는 칼로 붓을 대신했는데, 필력이 억세며 기세가 웅장하다. 예술 전통의 오랜 흐름 속에서 이러한 훌륭한 작품들은 지금까지 그 용도가 계속 넓혀지고 있어 검증의 토대가 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서화·서적·신문·잡지 및 표지의 명칭에 예술적인 효과를 풍부하게 하고 있다.

한국에서 전각이 출현한 시기는 도장이 사용되기 시작한 고려시대라고 볼 수 있으며, 조선으로 전승되어 동인·철인 등이 만들었다.

숙종 때의 허목(許穆)이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