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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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표기 언어 chuanshu , 篆書

요약 한위 이전에 쓰이던 글자체이다. 협의로는 주문과 소전을 가리키고 광의로는 갑골문, 금문, 주문, 춘추전국시대에 통용되던 문자와 진대에 창시된 소전을 말한다. 갑골문은 전기에는 큰 글자가 많고 글자가 웅장하고 기이하며, 후기에는 작은 글자가 많고 아주 정밀하다. 금문은 은대에서 서주 초기까지는 방필용절이었고, 서주 중엽 이후 동주 초기에는 원필용전으로 바뀌었다. 춘추시대에는 글자체가 점차로 가늘면서도 힘이 있었으며, 전국시대의 글자체는 혼란스럽고 기이하게 변했다. 주문은 주서 또는 대전이라고도 하는데, 현존하는 석고문이 대표적인 것이다. 대전은 협의로는 주문만을 가리키고, 광의로는 갑골문·금문·주문과 춘추전국시대에 통용되던 문자를 두루 가리킨다. 주문의 기초 위에서 발전한 소전의 글자체는 둥글고 가지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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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위(漢魏) 이전에 쓰이던 글자체이다.

협의로는 주문과 소전을 가리키고 광의로는 갑골문, 금문(金文), 주문, 춘추전국시대 각국에서 통용되던 문자와 진대(秦代)에 창시된 소전을 가리킨다. 여기서는 광의의 전서에 대해 알아보기로 한다. 갑골문은 청대(淸代)말인 1899년부터 지금까지 10여 만 편(片), 총 4,600개 정도의 다른 글자가 출토되었고, 현재 식별된 것만도 2,000여 개쯤 된다. 이는 은대(殷代) 후기 270여 년 간의 정치·경제·문화 상황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이다.

갑골문은 오늘날 볼 수 있는 한자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문자구조는 단순한 것에서 합성된 복잡한 것으로 변화를 보이고 있을 뿐만 아니라 형성자가 많이 나타나고 부호화의 정도가 높다. 이것은 장기간에 걸쳐 발전해온 것으로 오래 전에 이미 문자가 생겨났음을 설명해준다.

갑골문 계열은 칼을 이용하여 글자를 새겼으며, 붓으로 쓴 것도 있다.

글자의 풍격은 전후 2기로 나눌 수 있다. 전기의 문자는 큰 글자가 많고 글자가 웅장하고 기이하다. 후기에는 작은 글자가 많고 글자의 풍격이 아주 정밀하다. 지금도 그것을 모방하여 배우는 사람들이 있다. 예전에는 금문을 '종정문'(鐘鼎文)이라 불렀는데, 실제로 은·주(周)·춘추전국시대의 종(鐘)·정(鼎)·준(尊)·작(爵)·병기·전폐 등의 청동기 위에 새긴 모든 글자를 포함한다. 그 서법의 풍격은 은대에서 서주 초기까지는 갑골문과 비슷하여 붓을 각지게 하여 꺾어쓰는 필체인 방필용절(方筆用折)이었으며, 대우정(大盂鼎)이 대표적이다.

서주 중엽 이후 동주 초기에는 붓을 둥글게 하여 돌려쓰는 필체인 원필용전(圓筆用轉)으로 바뀌었으며, 산씨반(散氏盤)과 모공정(毛公鼎)이 대표적이다. 그 후 춘추시대에 이르러서는 붓을 사용하게 되어 글자체가 점차로 가늘면서도 힘이 있었다. 제(齊)나라의 중강박(仲姜鎛)이 대표적이다. 전국시대에 이르러서는 시대가 혼란하여 금문(金文) 자체(字體)도 혼란스럽고 기이하게 변하여 알아볼 수 없는 것도 있다. 고대문자는 이때에 이르러 분열현상을 보인다.

은·주 시대의 금문서법은 청대 중엽 이래로 모사하는 사람이 차츰 늘어났다. 저명한 사람으로는 장정제(張廷濟)·오대징(吳大澂)·이서청(李瑞淸) 등이 있다. 이서청은 "석고문에서 팔분체를 습득하고, 금문에서 전서를 습득했다"라고 말했다. 그는 거친 붓을 사용하여 힘차면서도 변화가 있어 독특한 풍격을 이루었다.

주문은 '주서' 또는 '대전'이라고도 하는데, 〈사주편 史籒篇〉에 기록된 데서 생겨난 이름이다.

주나라 선왕(宣王) 때 태사(太史) 주(籒)가 편찬한 것이라고 전해진다. 주 왕실이 동쪽으로 천도한 후 진이 주 땅에 자리를 잡음으로써 춘추전국시대에 진나라에서 통용되었다. 현존하는 석고문이 바로 이 글자체의 대표적인 것이다. 최초의 석고는 현재 베이징 구궁 박물관[北京故宮博物館]에 보관되어 있는데, 이것은 중국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석각문자이며, 역대로 그 서법의 예술성이 높이 평가되어왔다.

근대의 서화가 우창숴[吳昌碩]가 이 글자체에 가장 정통했는데, 웅건·소박하면서도 다채롭고 기백이 웅대한 풍격을 이루었다. 대전 역시 광의와 협의의 2가지 뜻이 있다. 협의로는 단지 주문만을 가리키고, 광의로는 앞서 말한 갑골문·금문·주문과 춘추전국시대에 각국에서 통용되던 문자를 두루 가리킨다.

소전은 대전에 대립되는 호칭으로 진전(秦篆)이라고도 한다. 이는 주문의 기초 위에서 발전하여 형성된 것이다. 진의 시황제가 중국을 통일한 후, 승상 이사(李斯) 등이 진나라 문자를 기초로 하여 표준글자체로 전국문자를 통일했는데, 이것이 바로 소전이었다. 이사는 각 지역의 이체자를 모두 추려내어 한자의 규범화에 커다란 역할을 했다.

소전의 형체는 둥글고 가지런하다. 이사가 쓴 것으로 전해지는 〈낭아대각석 琅玡臺刻石〉·〈태산각석 泰山刻石〉이 남아 전해지고 있는데, 역대로 소전서법 예술의 최고 본보기로 여겨진다.

한·위 이후 예서·팔분체가 성행한 이래 예서와 팔분체의 서법으로 소전을 쓴 것이 많은데,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삼국시대 오(吳)의 〈천발신참비 天發神讖碑〉이다. 북조와 초당(初唐)의 비석머리에도 역시 소전을 팔분체와 같은 체제로 많이 썼다. 성당(盛唐)에 이르러 이양빙(李陽氷)이 나와 팔분체의 기세를 모두 없애고, 이사를 종(宗)으로 삼았다.

이후 1,000여 년 간 소전서법의 명가로 대개 이들 두 이가(李家:이사와 이양빙)를 꼽는다. 청대 중·말기 등석여(鄧石如)·윤병수(尹秉綬)·조지겸(趙之謙) 등이 측필로봉(側筆露鋒)을 사용함으로써 비로소 새로운 풍격이 출현하게 되었다.

한국의 전서체 예로는 단군시대의 옛 비로 전하는 구월산의 고전비(古篆碑), 최치원이 쓴 진감선사비의 전액(篆額)인 당해동진감선사지비(唐海東眞鑑禪師之碑)의 9자 등이 있다. 또 조선 중기의 허목(許穆)은 초전의 특색을 살린 독특한 전서를 쓴 것으로 유명하다.→ 서예

허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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