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넬

파넬

다른 표기 언어 Charles Stewart Parnell
요약 테이블
출생 1846. 6. 27, 아일랜드 위클로 애번데일
사망 1891.10.6, 잉글랜드 서식스 브라이턴
국적 아일랜드

요약 아일랜드의 민족주의자.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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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2. 초기생애
  3. 아일랜드 자치동맹과 토지동맹
  4. 의회에서의 술책
  5. 파넬의 몰락

개요

영국 의회의원(1875~91)을 지냈으며 19세기말 아일랜드 자치 운동을 이끌었다.

1889~90년 캐서린 오셰이와의 간통사건이 사실로 밝혀짐으로써 곧 결혼했다.

초기생애

그는 보통의 영국계 아일랜드 프로테스탄트 지주계층 집안과는 달리 반영 감정이 뿌리 깊은 가정에서 자랐다.

그러나 부모는 이때문에 그에게 같은 계층의 다른 아이들이 받는 교육을 받지 못하게 하지 않았다. 그는 영국의 기술학교를 3군데 다녔으나 거기서 불행하게 지낸 것으로 보인다. 이후 케임브리지대학교에 들어가 평범한 학창시절을 보내다가 1869년 매우 사소한 규율을 어겼다는 이유로 정학을 받았고 이후 복학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아일랜드 자치동맹과 토지동맹

파넬이 되돌아간 곳 아일랜드는 들끓고 있었다.

정부가 아일랜드 공화파 형제단(페니언단)을 억압한 조처는 온건한 아일랜드인에게까지 강렬한 민족주의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1870년 아일랜드의 자치를 쟁취하기 위해 아일랜드 지방정부에 압력을 넣을 목적으로 새로운 정치단체인 자치동맹이 결성되었고, 1874년에는 영국 의회에 56명의 의원을 진출시켰다. 이 의원들은 명목상 아이작 의 지도로 의회 내에 정당을 조직했다. 비록 사회적으로 보수적 성향이 있거나 로마 가톨릭 교회의 위계질서를 따르는 측면이 있지만 모든 의원들은 어느 정도는 민족적 감정을 호소했다.

자치운동 후보로서 매우 적격이었던 파넬은 1875년 4월 미스 군(郡)대표 의원으로 하원에 선출되었다. 그는 2년 만에 하원의 견해에 대한 냉담함과 아일랜드 민족주의적 견해로 두각을 나타냈다. 아일랜드인들의 요구에 대한 관심을 끌기 위해 잉글랜드인들의 입법활동을 의사방해로 저지하는 수법을 사용했고, 수려한 풍채와 위엄 있는 성격으로 강한 호소력을 주었다. 1877년 9월 영국에 있는 아일랜드 자치운동 연합은 그를 의장으로 선출했다. 그는 31세의 나이에 아일랜드 정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인물이 되었다.

1878년 아일랜드의 농업 위기로 1840년대의 끔찍한 기근과 소작농의 대량 퇴거현상이 다시 일어날 듯했다.

퇴거 압력에 저항하고 아일랜드 지주들의 활동을 막기 위해 1879년 페니언 단원인 마이클 대비트에 의해 아일랜드 토지동맹이 창설되었다. 많은 온건파들은 이 동맹을 비난했으나, 파넬은 동맹에 가담해 초대 회장이 되어 위대하고 '새로운 출발'을 시작한 민족운동의 중심인물로 떠올랐다. 이 새로운 운동은 혁명적 열의와 토지운동을 결합시켰으며, 의회에서 의사방해 전술을 구사하고 있는 '적극적인 분파'인 의원들의 지지를 받았다.

1880년 총선거를 치른 얼마 후에 파넬은 새 의회에서 자치운동 단체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온건한 아일랜드 토지개혁법이 상원에서 거부당하자 그는 대규모의 토지운동을 조직했고, 이를 위해 성직자와 '온건한' 견해를 지닌 사람들의 지지를 얻어냈다. 이 운동에 발맞추어 의회에서는 대규모의 의사방해 전술을 진행했으므로 모두 36명의 아일랜드 출신 의원들이 자격정지 처분을 받았다. 동시에 파넬은 토지동맹이 제시한 의회 이탈 방침을 거부했다.

1881년 공정한 소작료는 사법적으로 결정되어야 한다는 원칙을 받아들인 글래드스턴의 토지개혁법이 통과되자, 파넬은 정치가로서 자질을 심판받을 중대한 문제에 직면했다(아일랜드토지법). 이 법이 통과되었다는 사실은 토지동맹이 거둔 위대한 승리임에 틀림없었으나 가장 활동적인 토지동맹원들은 이에 만족하지 않았으며 운동은 분열될 것처럼 보였다.

파넬은 토지를 임차받기 전에 몇몇 선택적인 경우를 제시함으로써 이 법을 시험하자는, 실제로는 온건한 정책을 따르면서도 격렬한 언어로 가득 찬 연설을 함으로써 이 위기를 모면했다. 그 결과 1881년 10월 13일 그가 기대했던 대로 더블린의 킬메이넘 감옥에 수감되었다. 이 일로 그는 지속적인 인기를 확보했고 뒤따른 사건들을 책임지지 않아도 되었다. 그의 체포에 뒤이어 토지동맹에 대한 탄압이 시작되었고 겨울 동안 지방에서 드문드문 테러가 일어났다.

정부에서는 파넬만이 질서를 회복시켜줄 인물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깨달았다. 1882년 봄 그는 자신의 석방 문제를 놓고 협상을 벌이기 시작했는데, 협상은 토지동맹의 '온건한' 회원인 윌리엄 오셰이 대위와 주로 벌어졌다. 오셰이의 아내는 1880년부터 파넬의 연인이었다. 킬메이넘 조약이라 불리는 협상이 타결되어 소작인들은 실질적인 양보를 얻어냈고, 파넬은 더이상의 소요를 막기 위해 모든 영향력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1882년 5월 2일 파넬이 석방된 지 며칠 만에 일단의 민족주의자들이 더블린의 피닉스 공원에서 아일랜드 담당장관과 차관을 살해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테러리즘에 대한 광범위한 반감을 불러일으켰고, 이로 인해 파넬은 별 어려움 없이 다시 확고한 규율로 민족주의 운동을 통제할 수 있었으며 아일랜드 민족동맹(토지동맹의 후신)을 의회의 아일랜드 자치당으로 흡수할 수 있었다.

의회에서의 술책

킬메이넘 조약으로 '새로운 출발'의 혁명적 국면은 막을 내렸다.

동부 얼스터 지역에서는 예외였지만 보궐선거 결과는 파넬의 확고부동한 지도력을 확인시켜 주었다. 더욱이 1884년 선거법 개정안이 통과된 이후 농업 노동자들에게까지 선거권이 확대되자, 파넬이 다음 의회에서 80~90명의 의원으로 구성된 당을 이끌 것이라는 사실이 확실해졌다. 이러한 잠재적인 힘을 가진 파넬은 고려되어야 할 세력으로 떠올랐다. 그는 조지프 체임벌린과 찰스 웬트워스 딜크가 이끄는 자유당 진보파의 지지를 얻기 위해 만들었던 예비교섭을 경멸하듯 거절했다.

토리당이 부상함에 따라 그는 매우 빠른 속도로 토리당과 아일랜드 연합을 구성해 힘을 합쳐 자유당 정부를 패배시키고(1885.6) 잇따라 11월과 12월의 선거운동을 벌여나갔다. 글래드스턴에게서 만족스러운 자치선언을 받아내지 못한 파넬은 '토리 투표 선언'을 발표했다. 그러나 아일랜드인들은 자유당을 몰아낼 수는 있었지만 토리당이 계속 집권하도록 할 수는 없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토리당은 즉시 아일랜드인들과 결별하고 아일랜드에 대한 강압 통치를 다시 시작할 의도를 밝혔다.

파넬 일당과 글래드스턴은 선거에서 힘을 합쳐 보수당을 실각시켰고, 1886년 2월 글래드스턴이 정권을 잡았다. 글래드스턴은 재임기간 내내 아일랜드의 지지에 의존했다. 골웨이 선거에 관해 의혹스럽고 심상치 않은 얘기가 나돌았다. 파넬은 이미 전에 "같은 일파가 되어 같이 투표하자"는 제의를 거부한 적이 있었으나, 오셰이 일파와 체임벌린의 압력을 받아 자치운동의 후보자로 오셰이 대위를 지명추천했다.

체임벌린이 파넬의 권위를 실추시키고 그의 일파를 분열시키려 했다는 증거가 있으나 실제로 이 일에 착수했더라도 아마 실패했을 것이다. 소수파의 반항은 잠잠해졌고 오셰이가 선출되었다.

광범위한 자치 조처를 포함해 글래드스턴이 내놓은 아일랜드 자치법은 민족주의자들의 열망에는 미흡한 점이 있으나, 파넬은 화해의 기초로서 이를 받아들이고 그들을 지지한다는 여론을 조성했다. 비록 나중에 하원의 제2심의 독회에서 거부당했으나(1886. 6), 이 법안의 도입은 파넬 개인의 승리로 받아들여졌다.

글래드스턴의 후임으로 보수당의 솔즈베리 경이 총리가 되자 파넬은 활발한 정치활동에서 얼마쯤 물러났다. 이것은 건강이 나빠졌기 때문이기도 했으나 정치적인 이유 때문이기도 했다. 아일랜드당은 야당과 굳게 연합하고 있었기 때문에 의사방해작전을 쓸 여지가 없었다. 파넬은 글래드스턴의 지도력에 도전하려고도 하지 않았으며 그의 추종자로 나서지도 않았다. 또한 윌리엄 오브라이언이 구상한 독창적인 소작료 납부 보류운동에도 냉담한 태도를 보였다.

파넬은 비교적 활동이 없는 편이었으나 오히려 적들의 노력을 통해 대중들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1887년 4월 18일자 〈타임스 Times〉에는 파넬이 쓴 것으로 보이는 피닉스 공원 암살사건을 묵과하는 내용의 편지 복사물이 실렸다.

파넬은 즉시 날조된 것이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 날조 사건 이후 약 2년 뒤 리처드 피것이라는 기자가 취조위원회 앞에서 행한 반대심문에서 사실을 자백했다. 얼마 후 피것이 마드리드에서 자살하자 잉글랜드 자유주의자들은 미심쩍은 동맹자로 보던 파넬을 영웅이며 순교자로서 받들기 시작했다.

파넬의 몰락

1889년 12월 24일 오셰이 대위는 파넬을 공동피고로 하는 이혼소송을 제기했다.

아일랜드당의 몇몇 당원들은 파넬과 그 연인과의 관계를 알고 있었으나 아일랜드 민족주의자들은 대체로 이 사건에 대해 자치운동을 파괴하려는 또다른 시도가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파악했다. 이것은 오셰이가 조지프 체임벌린의 추종자였다는 사실 때문에 그렇게 왜곡된 것이었다. 이 이혼소송의 배후에 정치적 동기가 있었다는 이론은 전적으로 틀린 것만은 아니다. 소송은 변호인 없이 진행되었고 1890년 11월 17일 법원은 파넬과 캐서린 오셰이에게 불리한 판결을 내렸다.

아일랜드 대중의 즉각적인 반응은 파넬을 옹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영국 내 비국교도들의 반응은 아일랜드 의회파가 괴로운 딜레마에 빠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며 적대적인 견해를 보였다. 파넬은 지도력을 유지하기로 결심하고 글래드스턴을 거부했다. 만약 아일랜드 의회파가 파넬을 지지한다면 자유당과의 동맹을 파기하는 것이며 그들 세대에 아일랜드의 자치를 이룩한다는 희망을 버리는 것을 의미했다. 반면 파넬을 거부한다면 그들은 한 잉글랜드인의 명령에 따라 그로부터 등을 돌리게 될 것이었다.

감정적인 긴 논쟁이 오고간 끝에 다수가 파넬의 지도력을 거부하기에 이르렀고 소수만이 그의 편을 들었을 뿐이었다.

이후 격렬한 선거운동이 전개되었다. 가톨릭계에서는 파넬이 지도자로서 도덕적으로 부적합하다고 선언했다. 파넬은 1891년 6월 캐서린 오셰이와 결혼함으로써 가톨릭계의 반대를 더욱 부채질했다. 파넬은 열렬한 정력과 과감함을 보이면서 더욱더 혁명적인 요소를 호소했다.

그의 호소는 청년들에게는 깊은 감명을 주었으나 아일랜드인 대부분에게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의 중요한 협력자였던 민족주의 잡지 〈프리먼스 저널 Freeman's Journal〉이 그가 결혼한 직후 적의 손에 넘어가자 그는 완전히 명분을 잃었다. 그는 1891년 10월 브라이턴에 있는 아내의 집에서 죽어 더블린의 글래스너빈 묘지에 묻혔다. 끝까지 파넬을 옹호했던 더블린 사람들은 장엄한 장례식을 치러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