튀르크제족

튀르크제족

다른 표기 언어 Turkic peoples

요약 역사적·언어학적으로 돌궐(突厥)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는 여러 민족을 통틀어 일컫는 말.

투르크제족(Turkic peoples)
투르크제족(Turkic peoples)

돌궐은 6세기에 몽골과 중국 북쪽 국경에서 흑해까지 뻗어 있는 제국을 건설한 북방 유목민족으로, 중국인들이 붙인 이름이다.

특히 터키의 유럽 지역과 볼가 강 유역을 비롯하여 일부 예외는 있지만, 튀르크계 종족은 주로 아시아에 살고 있다. 역사와 언어 이외에 튀르크계 종족의 가장 중요한 문화적 유대는 시베리아 동부에 사는 야쿠트족과 볼가 강 유역의 추바슈족을 제외하고 모두 이슬람교도라는 점이다.

튀르크계 종족은 크게 서부 및 동부 집단의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서부 집단은 유럽의 튀르크계 종족과 터키의 아시아 지역 및 이란 북서부에 거주하는 서아시아의 튀르크계 종족으로 이루어져 있다. 동부 집단은 옛 소련 땅에 살고 있는 튀르크계 종족과 중국 신장웨이우얼 자치구[新疆維吾爾自治區] 지역에 거주하는 튀르크계 종족으로 이루어져 있다. 튀르크계 종족은 인류학적으로 매우 다양한 유형을 보여준다. 이들 대다수는 검은 피부를 가졌다고 말할 수 있지만, 타타르족과 튀르키예인은 대부분 서유럽인들만큼 피부가 희다.

튀르키예인을 제외하면, 1917년에 러시아 혁명이 일어난 뒤 소련에 여러 공화국이 형성되고 1955년에 중국에 신장웨이우얼 자치구가 수립될 때까지 지속적인 국가 체제나 정치적 실체를 가졌다고 말할 수 있는 튀르크계 종족은 하나도 없다.

튀르크계 종족 가운데 가장 수가 많은 민족은 튀르키예인이고, 그 다음이 주로 우즈베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에 거주하는 우즈베크족이다(우즈베크족). 우즈베크라는 이름은 이슬람교를 받아들인 킵차크 한국(汗國)의 통치자들 가운데 한 사람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으로 여겨진다.

나중에는 킵차크 한국의 지배계층을 이룬 이슬람교도들을 우즈베크라는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다. 또다른 다수 집단은 카자흐족이다. 이들은 킵차크 한국의 일부를 이루고 있던 킵차크 부족들이 모여 이루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카자흐족은 대부분 카자흐스탄에 살고 있다. 중국의 신장웨이우얼 자치구와 그 이웃에 있는 간쑤 성[甘肅省] 및 칭하이 성[靑海省]에도 80만 명의 카자흐족이 살고 있다.

기원이 분명하지 않은 키르기스족은 키르기스스탄에 살고 있으며, 중국 서부에도 소수가 살고 있다.

투르크멘은 1924년까지는 정치적 통일체를 갖지 못한 채 부족단위로 유목생활을 하던 민족이었다. 이들은 대부분 투르크메니스탄에 살고 있지만, 이란과 아프가니스탄에도 상당수 거주하고 있으며, 이라크·시리아·튀르키예에도 소수 살고 있다.

이란의 동부 및 서부 아제르바이잔 주에 거주하는 아제르바이잔족은 단일민족이다(아제르바이잔족). 이들은 1828년에 맺어진 튀르크만차이 조약에 따라 러시아 제국과 페르시아 제국에 나뉘어 살게 되었다.

옛 소련 지역에 거주하는 카라칼파크족은 카자흐족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으며, 카자흐어는 카라칼파크족의 언어와 매우 비슷하다(카라칼파크족). 타타르족은 두 집단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하나는 오늘날 러시아 연방의 타타르스탄에 살고 있는 타타르족이고, 또 하나는 일찍이 크림 반도에 거주하다가 1944년에 강제로 고향에서 쫓겨나 오늘날에는 주로 우즈베키스탄에서 살고 있는 타타르족이다(타타르족). 첫번째 집단은 킵차크 한국을 구성했던 토착 튀르크계 부족들의 자손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여기에 불가리아인의 피가 섞였을 가능성도 있다.

바슈키르인은 바슈키리야가 있는 러시아 연방의 유럽 지역 동부와 우랄 산맥 너머에 널리 흩어져 살고 있다(바슈키르인). 바슈키르어는 순수한 튀르크어 계열이지만, 문화에는 여러 요소가 뒤섞여 있다.

일부 민족지학자들은 이들이 원래는 헝가리인이었다고 믿고 있다.

카프카스 지역에 사는 카라차이족과 발카르족의 기원은 분명하지 않다.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이들은 카프카스 지방의 오세트족과 섞이게 되었는데, 인류학적으로 오세트족과 구별할 수 없다.

1979년에 실시한 소련의 인구조사에 따르면, 카라차이족의 수는 13만 1,000명이고, 발카르족의 수는 6만 6,000명이다. 이들은 제2차 세계대전 때 중앙 아시아 지역으로 강제 이주되었지만, 그후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 허용되었다. 시베리아의 야쿠트족은 언어 때문에 튀르크계 종족으로 분류되지만, 이들의 기원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야쿠트족). 이들은 바이칼 호 지역에서 북쪽으로 이주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들의 문화는 몇 가지 점에서 인접지역에 살고 있는 시베리아 민족들과 비슷하다. 추바슈족은 볼가 강 지역에 살고 있는 비(非)슬라브족 공동체 가운데 가장 큰 공동체로 꼽힌다. 이들은 러시아 정교를 믿고 있는데, 이들의 혈통이 튀르크계임을 나타내주는 것은 언어뿐이다. 위구르족은 중국 신장웨이우얼 자치구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중앙 아시아 지역에도 소수의 위구르족이 살고 있다.

돌궐

돌궐 제국의 영역
돌궐 제국의 영역

돌궐족은 6~8세기경 몽골 고원과 알타이 산맥을 중심으로 유목생활을 하던 튀르크계 민족이다.

지배 씨족인 아사나씨(阿史那氏)는 처음에 알타이 산맥 서남쪽으로 가서 유연(柔然)에게 복속되어 있었지만, 족장 토문(土門) 때 그 세력이 강대해졌다. 551년 토문은 유연에게서 독립하여 스스로 이리 카간(伊利可汗)이라 칭하고, 동생인 디자브로스를 서쪽으로 파견하여 튀르키스탄을 경략하게 했다. 그후 제3대 목간 카간(木杆可汗) 때 유연을 멸망시킨 뒤 거란을 정벌하고 키르기스를 장악한 다음 본거지를 북몽골의 우트켄 산으로 옮겼다.

한편 튀르키스탄에서는 디자브로스가 사산 왕조 페르시아와 협력하여 에프탈을 멸망시키고(563~567), 서면 카간(西面可汗)으로서 세력을 떨쳤다.

이들은 처음에는 소그드 문자를 썼다. 현재 소그드문자로 된 〈목간특근기공비 木杆特勤紀功碑〉가 남아 있다. 후에 소그드 문자의 자모를 빌어 돌궐 문자를 만들었다. 관제(官制)로는 카간 아래 엽호(葉護)·설(設)·특근(特勤)·사리발(俟利發)·토둔(吐屯) 등 28관원이 있었다.

세금으로 유목민들에게 병마를 징발했고 각종 가축에 과세를 부과했다.

돌궐의 세력은 급속히 강대해졌지만, 카간의 지위를 둘러싸고 동족간의 싸움이 그치지 않아 통일의 기반이 취약했다. 중국을 통일한 수(隋)나라는 교묘한 돌궐 이간책을 써서 이시바르 카간(沙鉢略可汗)때인 583년 튀르키스탄의 서면 카간을 독립시켰다. 이때부터 돌궐은 서돌궐과 동돌궐로 나누어졌다.

동돌궐은 도남 카간(都藍可汗)의 치세 때 그와 달두 카간(達頭可汗), 돌리 카간(突利可汗)이 서로 싸우다, 603년 결국 돌리 카간은 수에 투항하고 도남 카간은 부하에게 살해되었으며, 달두 카간은 수나라 군대에 격파되어 달아났다. 돌리 카간은 계민 카간(啓民可汗)으로 개칭하고 오원(五原) 지방에서 유목지를 얻어 북몽골 지역에 거주하던 철륵(鐵勒 : 당·송대(唐宋代)에 중국인이 튀르크족을 부르던 이름) 각 부(部)를 통제하게 되었다. 돌궐의 혼란기에 철륵 각 부가 세력을 신장시켰지만 동·서 돌궐이 다시 강대해지면서 다시 이들에 예속되었다.

즉 동돌궐에서는 시필(始畢)·처라(處羅)·힐리의 세 카간이 연이어 옛날의 국력을 회복했고, 서돌궐에서는 사궤(射匱)·통엽호(統葉護)의 두 카간이 동방의 철륵 각 부와 서방의 페르시아·쿠샨 등을 정벌하고 튀르키스탄에서 패권을 장악했다. 서돌궐은 실크 로드 중간에 자리잡고 있어 각국 상인의 왕래가 끊이지 않았고, 또 이곳에 불교·조로아스터교·네스토리우스교(景敎) 등이 전파되었다. 당의 현장(玄奘)도 이곳을 거쳐가면서 통엽호 카간의 도움을 받았다.

이와 같이 서돌궐은 지리적 중요성으로 동서 문화와 경제교류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동돌궐은 630년에, 서돌궐은 657년에 각각 당에 멸망되었고, 당은 이곳의 각 지역에 도독부(都督府)·도호부(都護府)·주(州) 등을 설치했다. 그러나 7세기말 서돌궐 지역에서는 돌기시(突騎施)가 독립했고, 동돌궐 지역에서는 아사나골출록(阿史那骨咄祿)이 당에 반기를 들었다.

골출록은 일테리시 카간 이라 칭하고 돌궐을 다시 세웠다. 이것을 후돌궐이라고 부른다. 동생인 묵철(默啜)이 그의 뒤를 이어 카파간 카간이 된 뒤로는 세력이 더욱 커져 거란·키르키스·탕구트를 정벌하고 돌기시까지 격파하여 영토가 동서로 1만여 리(里), 병력이 40만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러나 만년에 정치가 어지러워지자 북방의 철륵 각 부가 반란을 일으켜 카파간 카간이 그들을 토벌하러 나갔다가 전사했다(716). 그뒤 카간의 지위를 둘러싸고 분쟁이 일어났지만, 결국 골출록의 아들 퀼테킨(闕特勤)이 형을 빌게 카간(毘伽可汗)으로 세웠다.

그는 스스로 군권을 장악하고 인망이 두텁던 톤육크(暾欲谷)를 고문으로 맞아들여 부족간의 안정을 도모했다. 빌게 카간은 주변의 여러 부족들을 정벌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734년 빌게 카간이 독살된 후 내란이 일어난 틈을 타 바슈미르·위구르·카를루크 등 여러 부족들이 독립함에 따라 후돌궐은 멸망했다. 후돌궐은 돌궐 문자를 사용했고, 빌게 카간, 톤육크, 퀼테킨의 공적을 기린 비문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