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메이너드 케인스

존 메이너드 케인스

다른 표기 언어 John Maynard Keynes
요약 테이블
출생 1883. 6. 5, 잉글랜드 케임브리지셔 케임브리지
사망 1946. 4. 21, 서식스 펄
국적 영국

요약 만성적 실업의 원인에 대한 혁신적인 경제이론으로 잘 알려져 있다. 케인스주의 경제학을 제창한 것으로 알려진 존 메이너드 케인스의 대표적 저작 〈고용·이자 및 화폐에 관한 일반이론〉에서 그는 정부가 주도하는 완전고용정책에 기초하여 경제침체에 대한 치유책을 주창했다. 이튼 스쿨을 졸업하고 케임브리지에 입학한 후 정치학과 경제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이후 제1차세계대전 후 처리과정과 1930년대의 경제적 비극에 대한 대응책이 케인스에게 불멸의 명성을 안겨주었다. 케인스는 순식간에 많은 경제학자들을 자신의 경제적 신념에 동조하도록 만들었다. 제2차 세계대전 시기와 그 이후에 서구 민주주의 국가들은 점차로 높은 수준의 고용을 유지하는 새로운 정책을 확신하게 되었다.

목차

접기
  1. 개요
  2. 성장배경
  3. 초기경력
  4. 케인스와 공황
  5. 후기경력

개요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만성적 실업의 원인에 대한 혁신적인 경제이론으로 잘 알려져 있다.

케인스주의 경제학을 제창한 것으로 알려진 존 메이너드 케인스의 대표적 저작 〈고용·이자 및 화폐에 관한 일반이론 The General Theory of Employment, Interest and Money〉(1935~36)에서 그는 정부가 주도하는 완전고용정책에 기초하여 경제침체에 대한 치유책을 주창했다.

성장배경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상당히 유복한 전문직 엘리트 가정에서 태어났다.

존 메이너드 케인스(John Maynard Keynes)
존 메이너드 케인스(John Maynard Keynes)

존 메이너드 케인스의 아버지는 존경받는 경제학자였고 훗날 케임브리지대학교의 대학행정관이 되었다. 진보적 성향을 지닌 장관의 딸이었던 케인스의 어머니는 케임브리지대학교를 졸업한 최초의 여학생 중 한 사람이었다. 탁월한 재능을 타고난 케인스는 상류층과 중상류층의 자녀들에게 제공되는 전통적인 교육과정을 이수했다. 사립국민학교를 졸업한 뒤 케인스는 영국에서 가장 유명한 사립학교인 이튼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작가인 조지 오웰과 시릴 코늘리 같은 재능 있는 영국인들이 학교에 대해 씁쓸한 추억을 지닌 것과는 아주 대조적으로 케인스는 즐거운 이튼 고등학교 시절을 보냈던 것 같다.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다소 예민한 기질을 지니고 있었고, 운동에는 소질이 없었으나 수학과 고전문학에서는 탁월했다. 케인스는 클뤼니의 베르나르, 스튜어트 군주의 특성, 동방과 서방의 차이점 등과 같은 다양한 주제에 관한 논문들을 발표하여 여러 가지 상을 받았다. 케인스는 자신의 최대의 장점인 누구에게나 상냥한 성격과 학생회를 이끄는 데서 보여준 탁월한 통솔력으로 자신만만한 그의 동료들로부터 존경과 칭송을 얻었다. 급우들은 전통적으로 이튼 고등학교의 행정에 참여해온 학생회 '폽'(Pop)의 일원으로 케인스를 선출했다.

1902년 케임브리지대학교에 입학한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그곳에서 더욱 두각을 나타냈다.

케임브리지대학교에서 가장 유서 깊은 칼리지 중 하나인 킹스 칼리지에서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한 전기작가가 표현했던 대로 "이튼 고등학교 시절 자신의 동료들로부터 획득했던 우월성"을 재빠르게 다시금 획득했다. 케인스는 논쟁적인 연사로 성장했고 대학생들의 하원이라고 할 수 있는 대학연합학생회의 회장이 되었다. 점차 케임브리지대학교의 지도적 경제학자인 앨프레드 마셜의 영향을 받게 되면서 케인스의 수학적 관심은 감퇴하고 정치학과 경제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케임브리지대학교에서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작가와 예술가들의 중요한 모임에 참여하게 되었다.

레너드 울프와 버지니아 울프 부부, 화가인 덩컨 그랜트, 미술평론가인 클라이브 벨을 구성원으로 하는 문화계 인사의 배타적 서클인 블룸즈버리의 초창기 역사는 케임브리지대학교와 리턴 스트레이치라는 탁월한 인물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존 메이너드 케인스보다 2년 일찍 케임브리지대학교에 입학한 스트레이치는 케인스를 단지 '협회'라고만 알려진 배타적인 사적 클럽으로 끌어들였다.

그들 중 몇몇은 존 메이너드 케인스 자신처럼 동성연애자였는데 그들은 블룸즈버리의 주도적인 인물들이었다. 케인스는 평생 동안 자유로운 정신의 소유자들인 이들에 대한 애정과 이들에게서 받은 영향을 소중하게 간직했다.

케임브리지대학교(University of Cambridge)킹스칼리지
케임브리지대학교(University of Cambridge)킹스칼리지

초기경력

케임브리지대학교를 졸업한 뒤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공무원이 되어 화이트홀에 있는 인도성(印度省)에 근무했다.

그곳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하여 최초의 대표작을 썼는데, 그 저작은 지금까지도 제1차 세계대전 이전 인도의 금융과 통화에 대한 정통한 해설로 여겨지고 있다.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케임브리지대학교로 돌아와 1915년까지 경제학을 강의했고,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재무부 관리로 임명되어 전시 경제의 관리업무에 종사했는데, 특히 연합국과의 경제협력 및 영국의 부족한 외환공급을 관리하는 책임을 맡았다. 케인스는 성공적으로 업무를 수행하여 공직자로서 인정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베르사유 평화협정은 존 메이너드 케인스의 전망을 변화시켰다. 경제고문 자격으로 로이드 조지 총리를 프랑스까지 수행한 케인스는 패전국인 독일에게 부과되는 배상정책의 비현실성과 그 과정에서 나타난 정치적인 속임수에 대해 자신의 건강을 해칠 만큼 낙담하게 되었다. 케인스가 아버지에게 보낸 한 편지에서 그는 임박한 '유럽의 황폐화'에 대한 우려로 공직에서 사임했다(파리 평화 회의).

행동가였던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개인적인 실망을 공적인 항의로 표출했다.

1919년 여름 2개월 동안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베르사유 협정을 비판하는 내용의 〈평화의 경제적 귀결 The Economic Consequences of the Peace〉이라는 책을 집필하여 크리스마스 무렵 출판했다. 이 논문이 갖는 중요성은 독일 경제에 지나친 배상부담과 그에 따른 지불 가능성의 결여에 대한 경제적 분석에 있다. 이 책은 우드로 윌슨, 클레망소, 케인스의 옛 상사였던 로이드 조지에 대한 풍자적인 묘사로 대중적으로도 성공을 거두었다.

그결과 화이트홀의 몇몇 집단에서는 존 메이너드 케인스의 사후까지도 그를 믿지 못할 사람이며 우상파괴주의자로 여겼다. 그러나 케임브리지대학교에서의 케인스에 대한 평판은 이것과는 다소 달랐다. 케인스는 경쟁적 시장이 어떻게 작동하고, 기업이 어떻게 운영되며, 소비자가 어떻게 자신의 소득을 지출하는가를 귄위 있게 설명했던 앨프레드 마셜과 A.C. 피구의 가장 뛰어난 제자로 평가받았다. 비록 1920년대에 씌어진 주요저작의 논조가 때때로 비판적이었을지라도 케인스는 공공정책에 의해 최소한도로 규제되는 자유방임주의가 가능한 모든 사회적 장치들 중 최선의 것이라는 당시의 전통적인 믿음에 직접적으로 도전하지는 않았다.

존 메이너드 케인스의 견해들 중 다음의 2가지는 1930년대에 그가 주도했던 이론적 혁명의 전조를 보여준다.

1925년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영국이 전전(戰前)의 대 달러 환율인 4.86달러하에서 금본위제로 복귀하는 것에 반대했고, 또한 대공황이 일어나기 훨씬 이전부터 영국의 석탄광부, 조선소노동자 및 직공들의 지속적인 실업을 우려했다. 이 시기에 로이드 조지와 화해한 케인스는 실업자에게 생활보조 대신에 유용한 일자리를 제공하자는 자유당의 공공사업계획을 지지했다. 그러나 여전히 대다수 경제학자들은 자유시장의 자동적인 조정을 믿고 있었고, 재무부는 공공사업으로 인한 정부적자의 증가가 사적 부문의 투자를 동일한 크기로 감소시킬 뿐이기 때문에 공공사업은 무용하다는 원론적인 입장에 집착하고 있었다.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아직 동료들의 의견에 대해 이론적으로 반박할 수 없었기 때문에 공공사업에 대한 그의 지지는 별다른 정치적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적자재정).

존 메이너드 케인스의 사생활은 보다 만족스러웠다. 1925년 케인스는 재능 있고 매력적인 발레리나인 리디아 로포코바와 결혼했다. '코러스 걸'에게 구애한 그의 지각에 대해 케임브리지의 보수주의자들이 보여준 의혹에도 불구하고 결혼생활은 행복했다. 실제로 앨프레드 마셜의 미망인은 케인스의 결혼을 "메이너드가 한 일 가운데 가장 잘 한 일"이었다고 회고했다.

블룸즈버리 서클의 성원들과의 우정도 더욱 깊어졌고 매우 성공적인 주식투자로 안락한 런던의 아파트를 쉽게 구입했다. 언제나 늦게 일어나는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침대에서 아침을 들면서 자신의 투자를 관리했다. 언론인으로서 케인스는 주요일간지인 〈타임스 The Times〉·〈맨체스터 가디언 Manchester Guardian〉(현재의 〈가디언 Guardian〉)뿐만 아니라 후에 자신이 편집진에 참여하게 되는 좌파 신문인 〈뉴 스테이츠먼 New Satesman〉에도 투고하면서 명성을 쌓아갔다.

케인스와 공황

존 메이너드 케인스의 대중적인 평판을 2번째로 바꾸어놓았으며 그에게 불멸의 명성을 가져다준 것은 1930년대의 경제적 비극에 대해 내놓은 그의 대응책이었다.

몇몇 주목할 만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정치가와 경제학자는 당시의 상황에 매우 당황했고 전통적인 정책에 대한 확신을 상실했다. 전통적인 경제학 이론에 반대되는 증거들이 쌓여감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경제학은 여전히 정부가 경제를 규제하지 않는다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번영을 회복하리라고 믿었다. 결국 실업자들은 보다 낮은 임금으로라도 기꺼이 일하려고만 한다면 언제든지 일자리를 구할 수 있고, 기업가는 상품의 가격을 저하시키는 동일한 전략으로 자신의 판매고를 회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 과정에서 취약한 기업 중 일부는 불가피하게 도산할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집단이 경쟁적 조정의 원리를 받아들인다면 곧 경기가 회복되고 호황과 보다 높은 임금수준으로 복귀할 것이라고 생각했다(대공황).

그러나 불행하게도 어느 부문에서도 개선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미국에서는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1932년 대통령선거에서 허버트 후버에게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는데 이것은 자유방임주의의 정치적인 패배를 입증하는 것이었다. 새로운 이론과 새로운 정책이 긴급히 요구되는 때에 존 메이너드 케인스가 이것을 제공했다. 지적인 면에서는 〈국부론 Wealth of Nations〉, 공공정책의 지침으로서는 맬서스의 〈인구론 Essay on Population〉에 필적할 만한 케인스의 저작은 경제학 논문들 중 금세기에 가장 영향력 있는 논문이며 끈질긴 노력의 결실이었다.

1935~36년에 출판된 〈고용·이자 및 화폐에 관한 일반이론〉은 1930년 〈화폐론 Treatise on Money〉에 부분적으로 암시되어 있던 새로운 사상에 대한 보다 기술적이고 심오한 해설이다. 그 핵심적인 내용은 2가지의 강력한 주장으로 요약될 수 있다.

첫번째는 실업에 관한 기존의 이론이 불합리하다는 것을 밝히는 것이었다. 존 메이너드 케인스에 따르면, 불황시에 실업을 제거할 정도로 낮은 임금이란 존재하지 않으므로 실업의 원인을 실업자에게 돌리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는 것이다. 2번째 주장은 실업과 불황의 원인에 대한 대안적인 설명으로 이것은 총수요, 즉 소비자·기업투자자 및 공공부문의 총지출을 핵심으로 하는데 총수요가 낮으면 판매와 고용이 감소하며 반대로 높으면 판매와 고용이 증가한다(공급과 수요).

이러한 일반적인 설명으로부터 경제행위에 대한 강력하고 포괄적인 견해가 피력된다(경제이론). 즉 소비자는 자신이 얻는 소득의 크기에 따라 지출이 제한되므로 경기순환변동의 원인이 될 수는 없다.

동적인 요인은 바로 기업투자자와 정부이다. 따라서 불황시에 해야 할 일은 사적 투자를 확대하거나 부족한 사적 투자를 대체할 수 있는 공적 투자를 창출하는 것이다. 경제가 다소 위축된 시기에는 신용을 완화시키고 이자율을 낮게 하는 화폐정책이 기업투자를 자극하고 완전고용수준의 총수요를 회복시킬 수 있다. 그러나 경제가 보다 심하게 위축된 시기에는 공공사업이나 빈곤층에 대한 보조금 등의 형태로 적자재정을 유지하는 보다 강력한 대책이 요구된다(재정정책).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순식간에 많은 경제학자들을 자신의 경제적 신념에 동조하도록 만들었다.

제2차 세계대전 시기와 그 이후에 서구 민주주의 국가들은 점차로 높은 수준의 고용을 유지하는 새로운 정책을 확신하게 되었다. 미국의 경우 1946년 '고용법'을 제정하여 공식적으로 대통령과 의회에 호황을 유지할 의무를 부과했다.

후기경력

〈일반이론〉은 존 메이너드 케인스의 최후의 주요저작이었다.

1937년에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심한 심장발작을 일으켰다. 2년 후에 비록 완전히 회복되지는 않았지만 케인스는 케임브리지대학교로 돌아와 다시 강의를 시작했고, 〈어떻게 전비를 조달할 것인가 How to Pay for the War〉라는 표제하에 전시금융에 관한 3편의 중요한 논문을 썼다. 그리고 다시 고문자격으로 재무부에 근무했다. 전쟁이 승리로 끝나자 케인스는 불황의 확산을 막기 위해 고안된 국제적인 금융기관의 설립에 관심을 돌렸고, 1944년 브레턴우즈 회의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그 협정에 의해 설립된 기관들인 국제통화기금(IMF)과 국제부흥개발은행(IBRD)은 존 메이너드 케인스의 견해보다는 당시 미국 재무부의 정통적인 이론의 영향을 더 받았다.

존 메이너드 케인스의 최후의 주요공적은 1945년 가을과 초겨울에 걸쳐 미국으로부터 수십 억 달러의 차관을 얻어내는 협상을 성공적으로 이끈 것이다.

이때부터 영국의 정계에서는 존 메이너드 케인스를 기꺼이 맞이하고자 했다. 케인스는 잉글랜드은행의 이사로 선출되었고, 틸턴의 케인스 경이 되었다. 관습적인 것을 중시하지 않는 블룸즈버리의 오랜 전통을 이어받은 케인스는 "나는 우리들, 노부인(영국은행의 별칭)과 나 둘 중 누가 정직한 부인이 될지 확신할 수 없다"라고 냉소적으로 말했다. 그러나 이러한 근심은 근거 없는 것이었다. 케인스의 오랜 적들은 이제 그들 나라의 가장 훌륭한 지식인 중 한 사람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전시의 지나친 활동으로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1946년에 생을 마감했다. 예술가·학자·정치가의 친구였고, 문화사업가, 천부적인 스승, 충실한 친구, 로크, 흄과 밀의 철학적 전통을 계승한 타고난 사상가였던 케인스는 말년에 샴페인에 더 취하지 못했던 것이 단지 유감이라는 말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