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로키족

체로키족

다른 표기 언어 Cherokee

요약 이로쿼이족 계열의 북아메리카 인디언.

체로키족(Cherokee)
체로키족(Cherokee)

테네시 동부지역과 캐롤라이나 서부지역에서 살았다.

원래 오대호 주변에 살았으나 델라웨어족과 이로쿼이족에게 패한 후 남쪽으로 이주했다. 1650년에는 약 2만 2,500명의 인구가 애팔래치아 산맥의 10만㎢에 이르는 지역에 흩어져 살고 있었다. 체로키족의 생활과 문화는 대체로 크리크족을 포함한 남동부 인디언과 비슷했다(크리크족). 체로키 부족연합은 붉은(전쟁)도시와 흰(평화)도시의 연합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붉은도시 추장들은 최고 전쟁추장에게 종속되었던 반면, 흰도시 관리들은 최고 평화추장의 지배를 받았다.

흰도시에서는 범죄자에게 은신처를 마련해주었으며, 붉은도시에서는 전쟁의식을 거행했다.

16세기 중반 유럽인들과 접촉할 무렵, 체로키족은 칼·도끼·끌을 비롯해 여러 가지 다양한 석기를 사용하고 있었다. 이들은 바구니를 짜고 도기를 만들었으며 옥수수·콩·호박을 재배하고 사슴·곰·순록으로부터 고기와 옷을 얻었다. 나무껍질로 지붕을 이은 통나무 오두막집에서 살았는데, 문이 1개밖에 없고 창문도 없었으며, 지붕에 연기 구멍이 1개 뚫려 있었다.

전형적인 체로키족 도시에는 보통 30~60채의 집과, 부족 총회가 열리고 성화(聖火)를 모셔놓은 회의소가 있었다. 버스크 또는 푸른 옥수수 축제라고 하는 중요한 종교의식을 통해 첫 수확에 감사하고 새로 불을 지피는 의식이 거행되었다.

여러 차례의 전쟁과 조약들, 미국 독립전쟁 때 잇달아 일어난 전투와 협정들로 인해 조지아 주, 테네시 주 동부, 캐롤라이나 서부지역에 살던 체로키족의 세력과 소유지가 상당히 줄어들고, 이들의 영토에 백인들이 마음대로 투기를 하거나 정착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지역에 200개의 마을을 이루고 살던 약 2만 2,000명의 체로키족은 18세기초 이후 교역과 군사적 협력에 있어서 영국인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다.

1773년 체로키족과 크리크족 인디언의 요청에 따라 맺은 오거스타 조약에 의해 조지아에 있던 8,000만㎢ 이상의 부족 영토를 넘겨주었는데, 이는 인디언들이 백인 상인들에게 진 빚을 갚기 위한 것이었다. 1775년 오버힐 체로키족은 시커모어숄스 조약에 따라 켄터키 중부 지역의 광대한 영토를 파는 데 동의했다. 트란설베이니어토지회사와 맺은 이 조약은 영국법에 위반되는 것이었지만 백인들이 이 지역을 가로채는 근거가 되었다.

식민주의적인 침략에 위협을 느낀 체로키족은 미국 독립전쟁 초기에 영국을 지지한다는 결정을 발표했다. 영국이 자제를 요청했지만 1776년 7월 드래깅 카누 추장의 지휘 아래 700명의 체로키족 전사들이 노스캐롤라이나에 있는 2개의 미국군 요새인 이튼 교역소와 워토가 요새를 공격했다. 그러나 두 지역에 대한 공격은 모두 실패했다. 이 습격을 시발로 변경지역 도시들에 대한 체로키족·크리크족·촉토족의 잇달은 공격이 시작되었으며, 그해 9~10월에 남부 여러 주에서 민병대와 정규군의 격렬한 반격이 일어났다. 패배를 겪은 인디언들은 디위츠코너 조약(1777. 5. 20)과 홀스턴의 롱아일랜드 조약(1777. 7. 20)에 따라 지금의 노스캐롤라이나·사우스캐롤라이나의 광대한 영토를 넘겨줌으로써 평화를 얻을 수 있었다.

그후 2년 동안에는 변경지역에 평화가 계속되었다.

1780년 미국군과 영국군이 접전하고 있는 동안 기습공격을 개시했으나 아서 캠블 대령과 존 세비어 대령이 지휘하는 보복작전으로 체로키족은 또다시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2번째 체결된 홀스턴의 롱아일랜드 조약(1781. 7. 26)에 따라 이전의 영토 양도가 확인되었으며, 추가로 또다른 영토의 양도가 결정되었다.

1800년 이후 체로키족은 백인 문화에 상당히 동화되어갔다. 미국 정부를 모방한 정부를 세웠고, 주날루스카 추장 시절에는 앤드루 잭슨을 도와 호스슈벤드 전투 등에서 크리크족과 대항해서 싸웠다. 백인의 농사짓는 법, 직조 기술, 집 짓는 법도 받아들였다. 백인 문화에 동화되었음을 보여주는 가장 두드러진 사례는 크리크 전쟁 당시 미군에서 복무한 체로키족 혼혈인 세쿼이아가 1821년에 개발한 체로키어 음절표기법이다.

세쿼이아 (Sequoyah)
세쿼이아 (Sequoyah)

그가 개발한 음절표기법은 각 상징들을 하나의 음절로 나타내는 표기 체계로서 크게 성공을 거두어 거의 모든 부족이 짧은 기간 안에 글을 익히게 되었다. 또 성문헌법이 채택되었으며 성서 번역을 비롯해 종교문학이 발달했다. 1828년 2월 최초의 인디언 신문 〈체로키 피닉스 Cherokee Phoenix〉가 발간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체로키족이 백인 문화를 받아들인다고 해서 백인 개척자들의 토지에 대한 욕심을 막아낼 수는 없었다.

조지아 주의 체로키족 영토에서 금이 발견되자 인디언들을 이주시키려는 운동이 일어났다. 1835년 12월 극소수의 체로키족이 서명한 뉴이코타 조약에 따르면 미시시피 강 동쪽 영토 전체를 500만 달러에 미국 정부에게 양도하게 되어 있었다. 대다수의 체로키족은 이 조약을 거부하여 미국 연방대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대법원은 조지아 주에는 체로키족에 대한 사법권이 없기 때문에 체로키족 영토에 대한 백인들의 권리도 없다고 판시함으로써 체로키족에게 유리한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조지아 주 관리들은 대법원의 판결을 무시했으며, 앤드루 잭슨 대통령은 판결의 집행을 거부했다. 마침내 1830년 인디언 이주법에 따라 체로키족은 윈필드 스콧 장군이 지휘하는 7,000명의 군인들에 의해 영토에서 쫓겨났다. 약 1만 5,000명의 체로키족이 수용소에 모여 있는 동안 백인 주민들이 체로키족의 집을 약탈하고 불태웠다.

그후 체로키족은 약 1,000명씩 무리지어 걸어서 서부로 이주해야 했다. 이 강제 이주와 행군은 1838년부터 1839년의 가을에서 겨울 사이에 이루어졌다(눈물의 이주). 마침내 본대(本隊)가 지금의 오클라호마 동북부지역의 새로운 거주지에 도착하자, 이미 그 지역에 살고 있던 원주민들과 새로운 다툼이 일기 시작했다.

뉴이코타 조약에 서명했다는 이유로 체로키족에 대한 앙갚음이 이루어졌고, 다툼과 살인으로 부족이 분열되었다.

오클라호마에서 체로키족은 1830년대 미국 정부의 정책에 따라 동남부지역에서 강제이주된 크리크족·치카소족·촉토족·세미놀족과 합류했다. 75년 동안 각 종족은 땅을 분배받아 살면서 미국 주정부를 모방한 준자치정부를 세웠다.

1907년 오클라호마 주 수립을 위한 준비로 이들 영토 가운데 일부가 인디언 개인에게 넘겨지거나 연방정부에 위탁되었으며, 해방된 노예들에게 분배되기도 했다. 1906년 여러 종족의 정부들은 사실상 해체되었으나 제한된 형태로 지금까지 남아 있다. 일부 인디언들은 보호구역이라는 부족 소유지에서 산다. 현재 오클라호마 동부지역에 사는 체로키족의 후손은 약 4만 7,000명이며, 그중 순수 혈통은 약 1만 5,000명이다. 1838년 이주 시기에 산악지대로 도망갔던 수백 명의 체로키족은 20세기 이후 노스캐롤라이나 서부지역에 살고 있는 3,000명의 체로키족의 핵심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