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클라호마

오클라호마

다른 표기 언어 Oklahoma
요약 테이블
위치 미국 중남부
인구 4,000,000명 (2020년 추계)
면적 181,037㎢
언어 영어
대륙 북아메리카
국가 미국

요약 주도는 오클라호마시티이다. 803년 미국이 루이지애나를 매입함으로써 미국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1907년 미국의 46번째 주가 되었다. 다양한 인구로 구성되며 종교는 남부침례교도와 연합감리교도들이 우세하다.
1828년 인디언 거주 지역으로 선포되어 1880년경까지 60여 개 인디언 부족이 강제 이주되었기 때문에 미국의 주 중에서 2번째로 인디언 주민 수가 많다. 현재 오클라호마의 인디언들은 전체 주민 6%다.
동부의 내륙고원과 남부의 해안평야, 그밖의 지역에은 내륙평야로 구성된다. 주요 수입원은 축산업이며 광물자원 목재자원이 중요한 산물이다. 최근 털사와 멕시코 만을 연결하는 너벅바지선 수로가 건설되었다.

북쪽은 캔자스·콜로라도 주, 동쪽은 미주리·아칸소 주, 남쪽은 텍사스 주, 서쪽은 텍사스·뉴멕시코 주와 경계를 이룬다. 주도는 오클라호마시티이다.

오클라호마, 오클라호마시티(Oklahoma, Oklahoma City)
오클라호마, 오클라호마시티(Oklahoma, Oklahoma City)

오클라호마에는 1만~1만 5,000년 전 사이에 인디언 사냥 부족이 크로비스와 풀섬 문화를 형성하고 있었다. 또한 500~1300년 사이에는 도기·섬유·조각품·금속식기 등을 제작한 정교한 문화가 존재했다. 이 문화는 서부평원에서부터 온 인디언 부족의 침략으로 인해 몰락하기 시작했다.

1541년 프란시스코 마스케스 데 코로나도의 탐험대가 이 지역에 도착했을 때 이 지역에 거주하는 인디언들은 최소한 3개 이상의 주요 인디언 부족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코로나도는 이 지역이 스페인 영토임을 선언했으나, 사실 광범위한 지역을 탐험하는 스페인 탐험가들의 경유지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못했다.

1714년 쥐슈로 드 생 드니가 오클라호마를 방문한 후 곧이어 프랑스인들은 이곳에 인디언과의 모피 교역소를 설치했다. 이 지역의 지배를 두고 프랑스와 스페인 간의 투쟁이 1763년까지 계속되었다. 그해 스페인 당국에 항의하는 인디언 부족이 패배한 프랑스군과 함께 떠나갔으나, 1800년 프랑스 군대의 개선과 함께 다시 돌아왔다. 3년 뒤, 미국은 프랑스로부터 루이지애나 매입을 통해 오클라호마를 자국의 영토로 편입시켰다.

오클라호마는 루이지애나 매입 영토 가운데 가장 먼저 인디언과의 모피 교역소가 설치된 곳이기도 했지만, 사실 가장 최후까지 인디언의 영토로 남은 곳이기도 했다. 백인들에 대한 인디언들의 적대감, 호시탐탐 이 지역을 노리는 스페인의 음모, 동부의 인디언들을 서부로 이주시키라는 백인들의 압력 때문에 미국 의회는 1828년 오클라호마를 인디언 거주지역으로 선포하고 모든 백인들을 이곳에서 철수시켰다.

1880년경까지 인근의 60여 개 인디언 부족이 인디언 준주로 강제 이주되었다(→ 인디언 특별보호구). 이들 중 일부는 정착하여 농경생활을 하는 평화적이며 상당히 개화한 부족들이었으나, 나머지는 사냥감과 목초지를 찾아 떠돌아다니던 매우 호전적이고 미개한 부족이었다.

인디언들의 주권은 미국 남북전쟁 초기까지는 비교적 잘 유지되었다. 그러나, 남부에서 이 인디언 준주로 이주해온 체로키족·촉토족·치카소족·크리크족·세미놀족 등 개화한 5개 부족들이 남부연합에 합병한다는 조약을 체결하자 연방정부와 매우 불편한 관계가 되었고 이후 연방정부의 간섭을 증대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인디언 준주는 남북전쟁중 전투지였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패배로 인한 손실 또한 실로 막대했다. 남북전쟁 이후 재건기는 이 지역 인디언에게는 또한번의 시련기였다. 이전의 노예에게 토지를 양도할 것을 강요받았고, 다른 지역으로부터 이 지역으로 추가적인 인디언의 집단 이주가 있었으며, 철도부설로 토지의 매각을 강요받았다.

오클라호마를 자유흑인들의 정착지로 만들려는 계획이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인디언 정부의 유약함으로 인해 인근 주들의 백인·흑인 모두에게 이용만 당했다. 이렇게 해서 이 지역은 인디언들에게 모욕과 굴종의 땅이 되었고 흑인·백인·황색인의 문화가 뒤죽박죽으로 섞인 잡동사니의 땅이 되었다. 철도회사와 부를 쫓는 백인들은 인디언 준주 안팎에서 모두 인디언 땅으로부터 부당이익을 취하고 있었다.

1879년경부터 '부머'(Boomer)라고 불리던 서부로 이동해온 백인들이 떼를 지어 인디언 거주지를 습격하곤 했다. 마침내 1889년 의회는 인디언 준주 서부의 80㏊ 땅을 백인들에게 개방하는 법령을 제정했다. 오클라호마 준주(1890 설립)라고 알려진 새로운 백인 거주지는 더욱더 확장되어 옛 인디언 영토의 절반 정도에 해당되었다. 1907년 인디언 준주의 나머지 지역이 오클라호마 준주와 합하여 미국의 46번째 주인 오클라호마 주가 되었다.

미국의 큰 자연지역들 가운데 세 지역이 오클라호마 주에 걸쳐 있다. 즉 동부에 내륙고원이 있고, 남부에 해안평야(텍사스와 멕시코 만 연안평야의 북쪽 연장부)가 있으며, 그밖의 지역에 내륙평야가 있다.

남부의 산지는 험한 지형과 척박한 토양을 특징으로 한다. 북동쪽으로는 경관은 아름다우나 지세가 험준한 오자크 고원이 있다. 중부지역은 산과 평야가 번갈아 펼쳐져 있으며, 서쪽에는 정상이 하얀 석고층으로 덮여 있는 산들이 있다. 하천은 해발 1,500m인 북서쪽에서 해발 150m인 남동쪽을 향해 흐른다. 북부와 중부는 주로 아칸소 강과 그 지류들이 흐르며, 남쪽 경계지역을 따라 레드 강이 흐른다.

강우량은 남동부에서 1,140㎜ 이상이고, 서부의 팬핸들 지역에서는 510㎜ 이하로 편차가 매우 크다. 기후는 연평균기온이 약 15.5℃로 온화한 편이다. 바람이 잔잔한 곳은 없으며, 전지역이 뇌우·눈보라·회오리바람의 영향을 받는다.

주민은 극히 다양한 분포를 보인다.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전체주민의 6%밖에 되지 않지만 주별로 보면 미국의 주 중에서 2번째로 그 수가 많다. 흑인은 인구의 약 7%이다. 1870년대의 광산 붐으로 인해 이탈리아인·그리스인·웨일스인·폴란드인·러시아인들이 이 지역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중국·일본·멕시코·영국·프랑스·캐나다·베트남 등에서도 이주자들이 왔다. 이들 대부분은 남부침례교도와 연합감리교도들이 우세한 전형적인 미국 중서부 문화에 동화되었다.

인구 중 2/3는 도시에 거주한다. 출생률과 사망률은 전국평균치에 가깝지만, 1970~80년의 인구증가율 18%와 1980~85년의 인구증가율 9%는 전국 평균치를 훨씬 상회하는데, 이는 주로 국내의 다른 지역에서 온 이주민 때문이었다.

가축(주로 소)과 축산품에서 얻는 소득이 작물에서 얻는 소득의 2배에 달한다. 주요작물로는 밀·건초·목화·수수·땅콩(낙화생) 등이 있다. 광업 생산액은 전국에서도 높은 편이며, 주요광산물은 천연 가스, 석유, 석탄, 원석 등이다. 목재자원도 중요하다. 그러나 그밖에는 북부와 동부 공업지대의 경제적 위성지역이라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노동력 중 1/4만이 제조업에 종사하고 있다.

기계류·금속조립제품·고무·플라스틱 등이 주요제조품목이다. 도로와 철도 편이 잘 갖추어져 있으며, 주에서 생산되는 석유제품이 그물처럼 복잡하게 얽힌 송유관들을 통해 수송된다. 최근 들어 수송체계의 일부로, 아칸소 강의 수문과 댐을 이용해 주 제2의 도시인 털사와 멕시코 만을 연결하는 너벅바지선(barge) 수로가 건설되었다.

인디언과 서부개척의 요람임을 자인하는 데 걸맞게 오클라호마에는 '인디언 명사들의 국립명예의 전당', '남부 초원의 인디언 박물관', '국립 카우보이 명예의 전당', '서부 유산 센터' 등이 있다. 몇몇 도시는 교향악단을 갖고 있으며, 털사에는 자체 오페라단도 있다.

1837년 체로키 인디언들이 이곳에서 인쇄업을 시작했으며, 수많은 일간신문, 라디오 방송국, 텔레비전 방송국 등이 있다. 노먼 시와 스틸워터 시에 주의 재정지원을 받는 주요대학이 있다.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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