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한론

정한론

다른 표기 언어 征韓論

요약 조선을 무력침공한다는 침략적 팽창론으로 1868년 메이지 유신을 전후하여 본격적으로 제기되었다. 이후 1873년경부터 정한론은 절정에 올랐다. 이것은 서구열강과의 불평등조약을 개정하기 위한 노력이 실패하면서 오는 좌절감과 메이지 유신과 개혁에 대한 불만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사이고를 비롯한 정한론자들은 이와쿠라, 오쿠보, 이토 히로부미 등 내치의 우선을 주장하는 점진적 정한론자들의 반대에 부딪혀 정치 분쟁을 벌인 후 시기상조파가 승리하면서 총퇴진했다. 한편 조선에서는 1873년 11월 대원군이 물러나면서 쇄국정책에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일본은 1875년 조선에 대해 운요호 사건을 일으킴으로써 정한론을 재등장시켜 무력위협으로 조선을 개항하게 할 것을 결정하였고, 결국 조선의 개항을 관철했다.

정한론(征韓論)
정한론(征韓論)

조선을 무력침공한다는 침략적 팽창론으로 도쿠가와 시대[德川時代]에도 제기되었으나, 1868년의 메이지 유신을 전후하여 본격적으로 제기되었다.

이들은 왕정복고와 존왕양이(尊王攘夷)를 주장하며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유업(遺業)을 계승하여 대륙을 공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1867년 3월초 규슈[九州] 출신의 일본인 야도[八戶順叔]가 홍콩에 체류하면서 광둥[廣東]에서 발간되는 〈중외신문 中外新聞〉에 "조선 국왕이 5년에 1번씩 에도[江戶]에 가서 대군(大君)을 알현하고, 공물을 바치는 것이 고례(古例)이나 조선 국왕이 이런 예를 폐한 지 오래되므로 일본이 군함 80척을 구입하고 발병(發兵)하여 조선국을 정토할 뜻을 가지고 있다"는 정한설을 주장하는 기사를 내자, 중국은 조선에 조심하라는 경고를 보냈다.

한편 조선에서는 대원군이 1863년 정권을 장악한 후 종래의 교린외교정책(交隣外交政策)을 지양하고 일본도 양이(洋夷)와 일맥상통한다며 척사척양(斥邪斥洋)과 같은 쇄국정책을 전개했다.

특히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의 침략을 물리친 뒤 척양정책을 더욱 추진하면서 청에 대해서는 종래와 같이 사대의 예를 지켜 유대를 강화하고, 일본에 대해서는 메이지유신 이후 더욱 배척했다. 그러나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 조선과의 새로운 관계 정립을 위해 쓰시마 도주[對馬島主]소[宗義達]를 통해서 대수대차사(大修大差使) 히구치[樋口鐵四郞]를 파견해 서계(書契)와 유신 정부의 국서(國書)를 부산의 조선 관원에게 전했다. 그러나 조선측은 야도의 침공설에 대한 해명을 요구하며 병인양요 이후 국사가 다망(多忙)하고 질병이 유행이라는 이유로 입국을 거절했다.

더욱이 일본의 서계에 '아방황제'(我邦皇帝)라는 문구와, 새 도장으로 찍은 것에 대해서 시정을 요구했다.

1869년초 일본 기도[木戶孝允]는 대신 산조[三條實美]와 이와쿠라[岩倉具視]에게 "조선을 정벌하면 일본의 국위가 세계에 떨쳐지고, 국내의 인심을 국외로 향하게 할 수 있다"며 정한론을 주장했다. 또한 쓰시마 도주에게 조선외교 실패의 책임을 전가시키며, 조선외교교섭권한을 회수하기 위해 외교의 실황을 조사하러 왜관에 파견한 사다 하쿠보[佐田白茅]는 귀국보고에서 정한론의 구체적 건백서(建白書)를 정부에 제출하면서, "조선은 불구대천의 적으로 반드시 정벌해야 하며 정벌하지 않으면 황위(皇威)가 서지 않는다.

30개 대대의 병력만 동원하면 4로(路)로 나누어 공격해 50일 내에 정복이 가능하다. 지금 프랑스와 미국이 조선침공을 계획하고 러시아가 호시탐탐하는데 일본이 우유부단하면 기회를 잃을 것이다. 재정면에서도 군사비는 50일 이내 회수가 가능하며, 조선은 쌀·보리 등 곡물이 풍부하고 조선인을 홋카이도[北海道] 개척사업에 전용(轉用)하면 일거양득이다"라며 즉시 출병을 주장했다. 출병안이 나오자 병부대보(兵部大輔) 기무라[木村永敏] 등의 동조를 얻은 기도는 "군대·함선·군자(軍資)·기계(器械)를 미리 준비하여 완급(緩急)에 대비하여야 한다"는 건백서를 정부에 제출했고, 7월 외무대승(外務大丞) 야나기하라[柳原前光]는 "북은 만주에 연하고, 서는 청과 접해 있는 조선을 우리의 영역으로 만들면 황국보전(皇國保全)의 기초로서 장차 만국경략진취(萬國經略進取)의 기본이 된다.

만약 다른 나라에 선수를 빼앗기면 국사(國事)는 이에 끝난다"며 조선 강점을 주장했다. 현직 외무대승(外務大丞)인 마루야마[丸山作樂]는 사다의 출병론에 공명하고 동지들을 규합하여 1870년 12월 "조선국은 황국을 위한 중지(重地)로서 지금 손을 쓰지 않으면 반드시 다른 나라가 정복할 것이다. 지금 때를 잃지 않고 속히 군대를 출동시켜 침공하면 반드시 공을 이룰 것이고, 조선이 문명개화한 뒤에는 도저히 정벌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하여 스스로 총지휘관이 되어 결사대를 모집하고 12월 중에 단독으로 조선에 침입하려는 일이 있었다.

그러나 이무렵은 일본 국내가 불안한 때라 참의(參議) 오쿠보[大久保利通] 등은 국내 문제를 선결로 하여 반대했다. 그러나 일본 외무성은 조선출병을 예상한 준비를 진행했다. 특히 조선 침략에 대한 청의 간섭을 막기 위해 1870년 8월 파견한 야나기하라가 청 직례총독(直隷總督) 이홍장(李鴻章)과 회담하고 다음해 4월 대장경(大藏卿) 다테[伊達宗城]가 전권대사로서 청국대표 이홍장과 청일수호조규상정해관세칙(淸日修好條規商程海關稅則)을 조인했다.

1870년 일본 외무성에서는 정식으로 외무소승(外務小丞)인 요시오카[吉岡弘毅]를 사절로 부산에 파견했으나 부산 왜학 훈도(訓導) 안동준(安東晙)은 "우리나라와의 모든 교섭은 소를 통해 정식 경로를 통하여 올 것"을 요구하며 거절했다.

국교정상화가 교착상태에 빠지자 곤란해진 쓰시마 도주는 해결책을 강구하여, 1870년 5월 상순부터 구례의 방식을 취하는 타협안을 내놓아 어느 정도 타결이 되는 듯했다. 그러나 주일독일대리공사 브란트가 외교교섭을 위해 군함을 거느리고 부산에 입항했다가 거절되자 공포로 위협한 사건이 발생했는데, 그 배에 역관 등 일본인이 동승한 사실이 밝혀져 조선에서는 반일감정이 격화되었다.

1871년 7월 일본은 400여 년 간 조선과의 외교를 전담하던 쓰시마 도주에게 세급직권을 박탈하고 대신 외무대승으로 임명하여 조선과의 수교를 관장하게 했다. 일본에서는 이 사실을 조선측에 알리기 위하여 외무권소승 요시오카, 외무대록(外務大錄) 모리야마[森山茂] 등이 11월 3일 부산 왜관(倭館)에 와서 면담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1872년 1월 모리야마, 히로쓰[廣津弘信], 외무성십등출사(外務省十等出仕) 사가라[相良正樹] 등이 왜관에 도착하여 서계를 전달할 것을 청했으나, 역시 허락되지 않았다.

그러자 이해 5월 20일 사가라는 왜관의 왜인은 규정된 지역을 벗어날 수 없고 절차를 밟지 않고는 부사를 만날 수 없다는 규정을 벗어나 왜관 주재 관리들을 이끌고 동래부로 몰려가 부사를 면접하려 했다. 이때 동래부사 정현덕(鄭顯德)은 이들을 책망하고 왜관으로 돌아가게 하자, 그들은 왜관에 머물던 자들을 모두 데리고 일본으로 돌아갔다. 이당시 일본 조야에서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호전적인 봉건군벌과 신흥 자본주의 세력을 앞장 세우고 대륙진출의 침략정책을 주장하는 무리가 유력하게 대두되었으며, 이들은 조선이 새로운 서계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외교 교섭을 외면하는 처사라고 정한론도 불사하겠다는 태도를 굳히고 있었다.

정한론이 일본 조야에 파다할 즈음 메이지 유신을 적극 지지해온 사쓰마 군벌[薩摩軍閥]의 거두로 메이지 정부의 참의(參議)인 사이고[西鄕隆盛] 및 이타가키[板垣退助], 외무경(外務卿) 소에지마[副島種臣] 등이 정한론에 가담했다. 일본 정부가 정한론에 따라 강경한 담판을 위해 1872년 9월 외무대승 하나부사[花房義質]를 파견했지만, 별 소득 없이 돌아갔다. 이때 부산 일대에서 미쓰이[三井] 계통의 상인들에 의한 밀무역 및 암거래가 성행하자 동래부 관헌들은 이들을 단속했는데, 부산 주재 일본 관헌 히로쓰가 이 사실을 일본정부에 상세히 보고함에 따라 일본 조야에서는 정한론이 더욱 고조되어 즉각 단행할 것을 요구했다.

그리하여 1873년 소에지마 등을 청에 파견하여 외교교섭을 한 결과, 청은 조선내정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다짐을 받아낸 뒤 정한론은 절정에 올랐다. 당시 우대신 이와쿠라 일행이 유럽 시찰중인 관계로 사이고·이다가키 등이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대병력의 동원을 주장하여 즉시 출병을 주장했다. 특히 사이고는 우선 자기가 대사(大使)로서 교섭을 시도하고 교섭에 실패하면 출병할 것을 주장함에 따라, 8월에 파견되기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그해 9월 구미제국의 발달된 자본주의와 근대국가를 보고 귀국한 이와쿠라, 오쿠보[大久保利通],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등은 일본국력은 아직 미약하므로 내치를 충실하게 하는 것이 급선무라며 정한론은 시기상조라고 주장했다. 이 두 파의 논쟁은 10월 24일 시기상조파의 승리로 끝나 칙령으로 조선출병은 무기연기되고, 사이고를 비롯한 정한론자들은 사표를 내고 물러났다.

정한론이 일단락된 가운데 조선에서는 1873년 11월 5일 척왜정책의 최고 책임자인 대원군이 물러나고 고종이 친정(親政)하면서 쇄국정책에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일본은 1874년 조선침략 대신 손쉬운 타이완을 침략했고, 이어 이듬해 조선에 대해 운요호 사건을 일으킴으로써 정한론을 재등장시켜 무력위협으로 조선을 개항하게 할 것을 결정하고 결국 조선의 개항을 관철했다(운요호사건). 정한론은 일본의 대륙팽창정책일 뿐 아니라 일본 국내 사정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그들은 구미열강을 본떠 조선을 침공하여 열강에 국력을 과시함으로써 자신을 구미열강과 맺고 있는 불평등조약을 개정하는 수단으로 삼고자 했으며, 메이지 유신 후에 배출된 불평사족을 외지전장으로 보내어 불만을 무마하고, 조선침략으로 국민의 관심을 밖으로 쏠리게 하는 동시에 조선의 자원을 일본으로 반출하고자 했다. 당시 정한론자와 비정한론자는 정치적 이해관계와 시기에 따라 달라졌을 뿐 본질적으로는 모두 같은 침략팽창주의자들이었다.

뒤에 정한론을 둘러싼 지배계급 내부의 갈등은 서남전쟁(西南戰爭)의 원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