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고 다카모리

사이고 다카모리

다른 표기 언어 Saigo Takamori , 西鄕隆盛 동의어 사이고 다카나가, 西鄕隆永
요약 테이블
출생 1827. 12. 7, 일본 규슈[九州] 가고시마[鹿兒島]
사망 1877. 9. 24, 가고시마
국적 일본

요약 도쿠가와 바쿠후를 전복시킨 메이지 유신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용기, 관용, 뛰어난 검술 등 사무라이가 지녀야 할 덕목을 두루 갖춘 인기 있는 지도자였다.
왕정복고에 참가하여 큰 공을 세움으로써 전설적인 영웅이 되었지만 그로 인해 자신이 속한 사무라이 계급이 몰락하게 되자 자신이 옹립한 덴노정부의 취약점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정부군과 반란군은 6개월에 걸쳐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나 마침내 그가 패하자 사전에 약속된 대로 충직한 부관이 그의 목을 쳐줌으로써 자결했다. 이는 일본인들에게 야마토다마시이(대화혼)의 상징이 되었고 일본의 이야기나 드라마에서 널리 사랑받는 주제인 '의리와 인정'의 갈등을 보여주는 대표적 인물이 되었다.

목차

접기
  1. 개요
  2. 어린시절
  3. 메이지 유신에서의 역할
  4. 평가

개요

본명은 기치베[吉兵衛] 또는 기치노스케[吉之助]. 호는 난슈[南洲]. 도쿠가와 바쿠후를 전복시킨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의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후 자신이 옹립한 덴노정부의 취약점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왕정복고(王政復古)에 참가하여 큰 공을 세움으로써 전설적인 영웅이 되었으나 왕정복고로 인해 자신이 속한 사무라이 계급이 몰락하게 된 것을 애석하게 여겼다.

어린시절

1827년 가고시마의 하급무사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낮았지만 명예로운 무사 집안으로 대대로 봉건영주인 다이묘[大名]의 근위(近衛)역을 담당해왔다. 소년시절부터 남달리 키가 크고 몸집이 건장했던 그는 어른이 되자 키가 거의 180㎝, 몸무게는 90㎏이나 되었다. 이때문에 동료들 사이에서 거인 취급을 받았고, 크고 날카로운 눈매에다 짙은 눈썹으로 인해 첫인상은 무섭게 보이지만 자상하고 소탈한 사람이었다. 또한 용기, 관용, 뛰어난 검술 등 사무라이가 지녀야 할 덕목을 갖추고 있어 주위에는 항상 동료와 추종자들이 몰려들었다.

자질구레한 사항에 신경쓰는 것을 질색했으며 결정은 신속하게 내렸고 논쟁보다는 실제로 행동하기를 더 좋아했다. 이러한 기질은 그가 받은 교육으로 더욱 심화되었다. 지행합일(知行合一)을 주장한 중국 철학자 왕양명(王陽明)의 사상과 함께 선종(禪宗)을 공부했고 경천애인(敬天愛人)을 좌우명으로 삼았다.

메이지 유신에서의 역할

40세가 못 되어 사이고는 수도 교토[京都]에 유수(留守)하는 사쓰마 한[薩摩藩]의 군대 대장이 되는 등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사쓰마 한의 유력한 정책결정자 중의 한 사람으로 도쿠가와 바쿠후를 전복시키게 되는 일본 전역의 덴노지지 세력과 폭넓은 유대를 가지고 있었다. 1864~65년에는 조슈 한[長州藩]으로 하여금 쇼군[將軍] 정부의 권위에 굴복하게 만드는 일을 거중(居中) 조정하는 등 당시의 복잡다단한 내정(內政)에도 관여했다.

또한 1866년 사쓰마와 조슈의 비밀연합을 성사시킨 소수 지도자들 중의 한 사람이었으며 쇼군의 사퇴를 은밀하게 강요하여 1867년 11월 8일 이를 성사시켰다.

그러나 사이고가 국민적 영웅이 된 것은 쇼군의 사퇴 이후에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 때문이었다. 쇼군의 사퇴로 행정적 공백이 생기게 되자 이에 불만을 느낀 덴노 지지파들은 쿠데타를 음모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나중에 메이지 유신으로 알려진 사건이다. 1868년 1월 3일 새벽 사이고 휘하의 군대는 왕궁을 장악했으며 이어 소집된 귀족회의에서 젊은 메이지 덴노는 일본에 새로운 시대가 개막되었음을 알리는 조칙(詔勅)을 내렸다.

이로 인해 쇼군 정부와 왕군 간에 내전이 벌어졌으나 곧 끝이 났는데, 이때 왕군은 주로 사쓰마와 조슈의 두 한[藩]이 동원한 병력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사이고는 1868년 5월 왕군의 참모장 자격으로 바쿠후가 있던 에도[江戶:지금의 도쿄]로 가서 함락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이어 그해 11월까지 일본 북부 지방의 쇼군 정부 지지세력에 대한 토벌작전을 계속해서 수행했다.

그는 마침내 일본 전역에 덴노의 절대 권위를 확립시키는 목표를 완수했지만 그뒤 새로운 정부를 조직하는 힘겨운 일에는 참여하지 않았으며 그렇다고 일본 국민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는 것으로 만족하고 덧없이 세월을 보내지도 않았다.

그는 고향인 사쓰마로 은퇴했다. 1869년 덴노가 왕정복고를 성사시킨 공신들에게 논공행상을 할 때 최고의 훈작을 받았지만 여전히 새로운 정부에 참여하지 않았다. 1871년 사이고는 마침내 여러 차례 설득을 당한 끝에 새로운 정부에 참여하게 되었고 약 1만 명의 병력으로 창설된 왕실 근위군의 사령관 근위도독(近衛都督)에 임명되었다.

비로소 믿음직스러운 군대를 보유하게 된 왕정복고의 지도자들은 그때까지 취해온 조치 중 가장 과감한 을 폐지하고 현(縣)을 설치하는 정책을 취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시점에서 신정부의 강화를 위해 사이고는 태정관(太政官)의 일원에 임명되었고 기도 다카요시[木戶孝允]와 함께 이 정책을 완수하는 공동책임을 맡았다. 이 정책은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따라서 각 한에서 보유하고 있던 군대는 해산되었다. 이렇게 하여 1871년말 신정부는 지방 군대의 잠재적인 위협에서 벗어나게 되었고 사이고는 1872년 여름 육군대장으로 승진했다.

그런데 이 시기에 징병제의 도입을 둘러싸고 심각한 의견대립이 벌어졌다.

정부의 일부 각료들이 유럽의 군대조직에서 영향을 받아 국민개병제가 필수적이라고 주장한 것에 반해 다른 각료들은 사무라이 계급이 전통적으로 갖고 있던 군(軍) 점유권을 빼앗는 것은 현명하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이같은 논쟁이 가열되는 동안 군부의 원로격인 사이고는 자신의 입장을 공식적으로 표명하지 않았다. 그는 개인적으로 국민개병제를 지지했던 것으로 알려졌는데 만약 그의 협조가 없었더라면 신정부는 국민개병제를 채택하지 않았으리라는 것이 통설(通說)이다.

그러면 그가 왜 공개적으로 이 제도를 지지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생겨난다.

사이고가 징병제도에 대하여 분명한 태도를 취할 수 없었던 것은 그 자신이 깊은 심리적 고통을 느끼고 있었다는 표시일 수도 있다. 일본이 사무라이 정신을 잃어가고 있다는 사실에 의구심을 느낀 그는 분명 돌이킬 수 없는 일련의 과정을 추진한 자기 자신의 역할을 후회하기 시작했으며 이같은 후회는 1873년 여름 조선 문제와 관련하여 표면화하게 된다.

'은자의 왕국' 조선은 공식적으로 메이지 정부를 인정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일본의 사절단을 3번씩이나 물리쳤다.

다른 여러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도 역시 조선의 태도가 모욕적이라고 느꼈고 조선을 응징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자신의 관점에서 볼 때 조선과의 전쟁은 사무라이 계급을 활성화시킬 수 있는 이점이 있었다. 사실 대다수의 사무라이들은 왕정복고가 초래한 근대화 추세에 대하여 못마땅하게 여기거나 반발하고 있었고 징병제도로 크게 위축되어 있었다.

사무라이 계급의 활성화라는 이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사이고는 태정관에서 기발한 제안을 내놓았다.

그 자신이 조선과의 현안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특사 자격으로 조선을 방문한 뒤 일부러 무례한 행동을 하여 조선인에 의해 피살되도록 함으로써 이를 계기로 조선에 선전포고를 할 수 있는 정당한 구실을 확보하자는 것이었다. 이 제안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높아지자 그는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 가장 큰 소원이라고 강조함으로써 반대의견을 모두 물리쳤다. 여러 번에 걸친 간곡한 탄원 끝에 그의 제안은 1873년 8월 18일 덴노의 재가를 받게 된다.

그 직후 이와쿠라[岩倉] 사절단 일행이 오랜 해외 여행 끝에 돌아오게 되는데 이들은 그 결정에 경악하면서 해외원정보다는 국내발전이 우선사항이라고 주장하여 사이고의 제안을 취소시켰다.

이같은 사태 반전에 격노한 사이고는 참의직(參議職)과 근위도독직을 사임하고 다시 가고시마로 돌아갔으며 다른 몇몇 고관들도 사직원을 제출했고 하급직에서는 100여 명 이상의 근위군 장교들이 사이고의 뜻을 따라 사퇴했다. 사태가 이렇게 진전되자 일본의 지도층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양분되고 말았다.

사이고가 그러한 과격한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은 그가 얼마나 깊은 심리적 타격을 받았는가를 잘 보여준다.

가고시마로 돌아간 뒤 몇 개월 후에 사이고는 군사학과 신체단련을 집중교육하는 사설 학교를 설립했다. 이에 일본 각지의 사무라이들이 몰려들어 1877년에는 학생수가 2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 사이고에게 이 학교는 공직에 뜻이 있는 젊은이들을 교육시키는 사설 학교에 불과했지만 도쿄의 신정부는 이를 두려워 했다.

가고시마 현에서는 현지사를 비롯하여 그 아래의 직급까지 모두 사이고 지지자들이 장악했고 빈 자리가 생기면 사이고 학교의 졸업생들이 우선적으로 채용되었다. 1876년 일본의 다른 지역에서 사무라이의 반란이 산발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감안한다면 가고시마가 대규모 반란의 중심지가 될지도 모른다고 정부가 우려한 것은 일리가 있는 것이었다.

정부는 권위를 확립할 목적으로 몇 가지 경솔한 조치를 취했는데, 이것이 이미 긴장되어 있는 분위기에 불을 지르는 격이 되었다.

이에 따라 1877년 1월 29일 일단의 사이고 제자들이 가고시마 무기고와 해군 공창을 공격하게 되었다. 덴노 정부에 대한 반란 사태가 이같이 전개되자 산중으로 수렵여행을 떠났던 사이고는 황급히 돌아왔다. 사이고가 가고시마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그의 지지자들이 병기창을 자체 운영하면서 추가 군사행동을 벌이기 위해 군수품을 나누어주고 있었다. 그는 마지못해 반란의 지도자가 되기로 했다.

자신들의 불만사항을 정부에 제출하겠다는 막연한 생각만을 가지고 도쿄로 진군하려는 계획이 수립되었고 이에 따라 사이고의 군대는 2월 15일 도쿄를 향해 출발했다.

정부군은 사이고군의 진군을 구마모토[熊本]에서 봉쇄했고 그후 6개월에 걸쳐 전면전이 벌어졌다. 사이고의 오랜 친구인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1838~1922]가 당시 육군 대장이 되어 토벌군 총사령관으로서 정부군을 지휘했다. 1877년 5월이 되자 사이고의 군대는 수세에 몰렸고 여름 내내 여러 번에 걸쳐 비참한 패배를 거듭하다가 9월에 전황은 결정적인 위기를 맞았다. 사이고는 수하의 수백 명만을 데리고 가고시마로 돌아와 시내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서 최후의 저항을 시도했다.

1877년 9월 24일 정부군은 마지막 공격을 개시했다. 이 전투에서 사이고는 치명상을 입었고 사전에 약속된 대로 충직한 부관이 그의 목을 쳐줌으로써 사이고는 자결했다. 그의 휘하에 있던 4만 명의 병력 중 약 200명만이 살아 남아 그해 2월에 투항했으며 양측의 사상자는 사망 1만 2,000명, 부상 2만 명으로 추산된다.

가고시마 시, 사이고 다카모리 자살지점 비석(南洲翁終焉之地之碑)
가고시마 시, 사이고 다카모리 자살지점 비석(南洲翁終焉之地之碑)

좁은 의미에서 볼 때 사이고의 반란이 실패했다는 것은 그가 평생 신봉해왔던 이상(理想)인 사무라이 시대의 종말을 뜻한다.

징병군이 사무라이를 패퇴시키자 정부는 두 번 다시 지방의 반란이나 사무라이의 위협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위대한 사이고도 성공할 수 없었다면 아무도 무모하게 또다시 나서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넓은 의미에서 볼 때 사이고는 승자이다. 그는 일본인들에게 있어 그들의 국민성인 야마토다마시이[大和魂]의 상징이 되었고, 일본의 이야기나 드라마에서 널리 사랑받는 주제 '의리와 인정'의 갈등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화신(化身)이 되었다.

그는 전설적인 인물이 되었고 1890년대까지도 그가 실제로 죽은 것이 아니고 때를 기다리며 은거중이라고 믿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평가

이같이 복잡한 성격을 가진 인물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엇갈린 평가가 있게 마련이다.

새정부를 지지하지도 않으면서 그 정부에 참여했다가 사퇴한 점, 또 마음속으로는 조선과의 전쟁을 바라면서 겉으로 조선에 협상을 제의하겠다고 한 점에서 볼 수 있듯이 사이고의 진정한 약점은 사물을 생각해나가는 데 있어서 그 결론에 이르기까지 시종 논리적인 일관성을 유지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는 그가 이성보다는 직관에 영향받는 일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사이고는 훌륭한 재능을 지닌 비극적인 인물로서 새로운 시대를 탄생시키는 데 많은 기여를 했지만 그의 마음은 그 시대에 완전히 적응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때문에 자신에게 가장 명예롭게 보이는 유일한 길인 자결을 통하여 탈출구를 찾았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