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마가타 아리토모

야마가타 아리토모

다른 표기 언어 Yamagata Aritomo , 山縣有朋 동의어 야마가타 쿄스케 왕자, Prince Yamagata Kyōsuke
요약 테이블
출생 1838. 8. 3, 일본 하기[萩]
사망 1922. 2. 1, 도쿄[東京]
국적 일본

요약 일본의 군인·정치가.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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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2. 초기 경력
  3. 정치권력에의 부상
야마가타 아리토모(Yamagata Aritomo)
야마가타 아리토모(Yamagata Aritomo)

개요

20세기 초반 일본이 강대한 군국주의 국가로 출현하는 데 큰 영향력을 행사했던 인물로서 의회체제하에서 최초의 총리(1889~91, 1898~1900)를 역임했다.

초기 경력

야마가타 아리토모(Yamagata Aritomo)
야마가타 아리토모(Yamagata Aritomo)

야마가타는 조슈 한[長州藩]의 최하위 무사 가문에서 태어났는데, 조슈 한은 1603~1868년 메이지[明治] 덴노에 의한 왕정복고가 이루어진 메이지 유신 때까지 일본을 다스렸던 군사독재체제인 도쿠가와 바쿠후[德川幕府]에 크게 반발했던 봉건 영지였다.

그는 조슈 한에서 재무국(財務局) 사환이자 경찰의 제보자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1858년경 사설학사(私設學舍)인 쇼카손주쿠[松下村塾]에서 교육을 받은 뒤 혁명적 존왕파(尊王派)의 일원이 되어 촉망받는 젊은이로 두각을 나타냈다. 당시 덴노를 지지하는 존왕파들은 도쿠가와 바쿠후가 커져가는 외세를 방치하는 데 격분하며 존왕양이(尊王攘夷)의 기치를 내걸었다.

1863년 조슈 한 혁명가들이 조직한 비정규군대 중 가장 유명했던 기헤이타이[奇兵隊]의 대장이 된 그는 1864년의 시모노세키[下關] 사건에서 부상을 입었는데 이 사건은 서구 열강의 연합함대가 조슈 한에 포격을 가한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결국 조슈 한의 패배로 끝났으며 야마가타는 이를 계기로 서구 열강의 우월한 군사제도에 눈뜨게 되었고 일본이 서구 열강처럼 성능이 우수한 현대식 군장비를 갖추지 않는 한 존왕양이파의 '반외세' 정책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지도자들을 설득했다.

1867년 도쿠가와 바쿠후는 전복되었고 이듬해인 1868년에 메이지 정부가 수립되었다.

북부지방에서 바쿠후 지지자들이 메이지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야마가타는 토벌군을 이끌고 원정에 나서 반란을 진압했다. 이 반란사건을 계기로 자신이 지휘한 평민군대가 북부지방의 정규군보다 우세한 것을 확신한 그는 국민개병제(國民皆兵制)가 국방에 가장 좋은 방법임을 인식하게 되었다. 야마가타는 일본군 근대화 조치의 일환으로 해외의 군사제도를 연구하고 1870년 귀국했다. 곧 병부소보(兵部少輔)에 임명된 그는 봉건 영지제도를 철폐하고 정치권력을 중앙집중화하기 위해 왕군인 고신페이[御親兵]의 조직을 제안했다.

1871년초 각 한에서 차출한 약 1만 명 규모의 군대가 조직되자 야마가타는 병부대보(兵部大輔)로 승진했다. 이 왕군은 나중에 근위(近衛)라고 개칭되었고 야마가타는 근위도독이 되었다. 이윽고 그는 군부 내에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했던 왕정복고의 영웅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의 도움을 받아 징병제도를 도입하는 데 성공했으며 정부가 군부를 육군과 해군으로 재편성하자 육군경(陸軍卿)이 되었다.

그뒤 사이고 다카모리가 자신의 조선정벌 제안인 정한론(征韓論)이 정부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는 데 대한 항의로 사직하자 야마가타는 정부 내에서 훨씬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한편 정부정책을 결정하는 권한이 대체로 태정관(太政官)의 참의(參議)에게 있었기 때문에 1874년 타이완 원정이 논의되었을 때 야마가타는 육군경이면서도 그 결정에 발언권이 없었다. 이에 따라 그는 군사정책과 문민통제를 분리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일본군이 아직 중국과 전쟁을 치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이유를 들어 타이완 원정을 반대했는데, 정부는 그의 반대입장을 완화하기 위해 1874년 8월 야마가타를 참의로 승진시켰다.

1877년 사쓰마[薩摩]의 사이고 다카모리와 그의 추종자들이 정부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을 때 야마가타는 토벌군 사령관이 되어 반란을 진압했다.

이 승리는 다시 한번 징병군이 사무라이군보다 우수하다는 것을 입증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군부 내에서 야마가타의 지도력을 더욱 굳건하게 해주었다. 1878년 야마가타는 '군인훈계'(軍人訓戒)를 발표하여 무용, 성실, 덴노에 대한 충성 등 전통적인 미덕을 강조함으로써 민주화·자유화 추세에 제동을 걸었다.

야마가타는 육군에서 작전부서를 분리하여 참모본부를 제정한 뒤 육군경직을 사임하고 참모총장이 되었다. 또한 일본의 군체제를 프로이센 군대를 본떠 개조하는 중대한 조치를 취했다.

1882년에는 덴노를 설득하여 '군인칙유'(軍人勅諭)를 선포하게 했는데 그 내용은 이전의 군인훈계의 반복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군인칙유는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항복할 때까지 일본 왕군의 정신적 지침이 되었다.

또한 청일전쟁에 대비하여 일본군을 야전운영에 알맞도록 재조직했다. 한편 참모총장으로 있을 때인 1882년부터는 정치에 입문하여 참의원 의장이 되었는데, 참의원은 정계 원로들의 모임으로 메이지 헌법의 기본원칙을 확정하는 데 대하여 정부에 자문하는 기관이었다. 1883~89년에는 내무상으로서 지방자치단체를 설립하고 경찰제도를 현대화했으며 지방자치단체와 경찰에 대한 감독 절차를 완성시켰다. 그는 항상 앞으로 생겨날 정당의 도전에 대비하여 강력한 행정부를 만드는 데 전념했다.

정치권력에의 부상

야마가타는 유럽의 지방자치 제도를 1년간 시찰하고 돌아온 뒤인 1889년 새로 마련된 의회제도 아래에서 첫 총리가 되었다.

일본 헌법의 초안을 작성했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보다 더 보수적이었던 야마가타는 처음 구성된 중의원(衆議院)에서 일본의 아시아 대륙에 대한 영향력을 더욱 확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육군대장으로 승진해 사실상 군 통수권자가 되었으며 덴노를 설득해 '교육칙어'(敎育勅語)를 발표하게 함으로써 메이지 시대의 정신적 지침을 마련했다.

1891년 야마가타는 정당간의 싸움에 지쳐 총리직을 사임했다. 그러나 법무상(1892~93), 추밀원 의장(1893~94)을 역임했고 덴노의 비공식적 자문기관인 겐로[元老]로 남아 있었다.

1894년 청일전쟁이 발발하자 야마가타는 조선에 주둔하는 제1군 사령관이 되었으나 전쟁중에 병이 나 일본으로 돌아왔다. 일본이 청나라에 승리를 거둔 직후인 1895년 5월 러시아·독일·프랑스의 외교적 간섭에 부딪히게 되자 그는 한반도를 양분하여 나눠가지는 방안을 가지고 러시아와 협상하자는 주장을 내놓았고 1896년 특명전권대사 자격으로 모스크바로 가서 이 협상을 성사시켰다.

청일전쟁
청일전쟁

1898년 원수로 승진하여 일본의 군부·정계 내에서 확고한 지위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그는 1898년 11월 제2차 야마가타 내각을 구성했다. 각료의 절반이 군장성으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는 이들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아시아 팽창주의 정책을 더욱 가속화시킬 수 있었다. 외세의 침입에 대항하여 중국 내에 의화단(義和團) 사건이 발생했을 때 야마가타는 영국의 요청을 받아들여 중국에 파견된 외국 군대 중 가장 규모가 큰 토벌군을 보냈다.

일본 파견군은 중국의 민족주의 운동을 진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고 일본의 국제적 위신을 한층 높여주었다. 국내 정치에 있어서는 태동단계에 있던 사회·노동 운동을 진압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으며 군대와 관료제도의 자치권을 강화하는 데 힘썼다. 그는 현역 육·해군 장교만이 육·해군 대신에 임명될 수 있다는 행정내규를 제정하여 사실상 군부를 문민 통제에서 해방시켰다.

1900년 10월 야마가타 내각은 군부확장정책에 의해 야기된 재정적 위기와 의화단 사건 이후 열강의 중국 분할 문제를 적절히 해결하지 못하게 되자 총사퇴했다.

그뒤 1903~09년에는 이토 히로부미와 번갈아 가며 추밀원 의장직을 맡았으며 1904~05년의 러일전쟁 때는 참모총장이었다. 러일전쟁에서 세운 혁혁한 공로를 인정받아 공작작위를 수여받았다. 일본과 러시아 사이에 다시 전쟁이 발발하리라는 가상하에 야마가타는 미국과 러시아를 상대국으로 하는 전시비상작전 계획을 수립했다. 제국국방방침(帝國國防方針)이라고 불리는 이 계획은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는 데 상당한 역할을 했다.

러일전쟁(Russo-Japanese War)
러일전쟁(Russo-Japanese War)

1909년 이토 히로부미가 암살된 이후 경쟁자가 없어진 상태에서 야마가타는 군부와 관료를 자신의 영향력 아래에 두고 이들의 지원을 받아가면서 사실상의 독재자로 일본을 통치했다.

그는 진정한 의미의 내각 구성을 지속적으로 반대했다.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났을 때 그는 청조(淸朝)를 지탱시키기 위해 도움을 주려 했고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직후에는 러시아와의 조약을 군사협약으로 바꾸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1921년 왕세자(뒤의 히로히토 왕)의 결혼문제에 간섭했다가 공개적으로 비난을 받았으며 이듬해 불명예 상태에서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