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 히로부미

이토 히로부미

다른 표기 언어 Ito Hirobumi , 伊藤博文 동의어 소로카쿠슈진, 滄浪閣主人\そうろうかくしゅじん, 슌보 공, 春畝公, 충정군, 忠貞君
요약 테이블
출생 1841. 10. 14, 일본 스오 구니[周防國]
사망 1909. 10. 26, 중국 만주 하얼빈[哈爾濱]
국적 일본

요약 일본의 정치가. 일본의 근대화 과정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했던 인물로 메이지 헌법의 초안을 마련하고 양원제 의회를 확립했다. 일찍이 영국에 유학하며 선진문물을 배운 뒤 귀국하여 관료 생활을 시작하였고, 미국과 유럽을 순방하는 등 경험의 폭을 넓히면서 고급 관료로 승진했다. 초대 내각총리로 일본이 천황제를 바탕으로 한 근대국가로 발전하는 데 기여했으며, 외교에도 능했다. 을사늑약 후에는 조선의 초대 통감이 되어 일본이 강제로 한반도를 병탄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1909년 중국의 하얼빈 역에서 독립운동가 안중근에게 저격돼 죽었다.

목차

접기
  1. 개요
  2. 초기 생애
  3. 정치 활동
  4. 헌법 제정과 의회 구성에 기여
  5. 한반도와의 관계
  6. 죽음과 평가

개요

이토 히로부미
이토 히로부미

근대 일본의 정치가. 19세기 후반 일본이 개화하는 과정에서 정치적 체제와 기반을 다지는 데 중추적 역할을 했다. 하급 무사 집안 출신으로, 22살 때 영국으로 유학하면서 근대화 된 서구 문물에 충격을 받고 돌아왔다. 이후 미국과 유럽을 순방하는 등 근대적 제도의 도입에 기여하면서 고급 관료로 성장했고, 메이지 정부의 헌법제정과 양원제 의회 수립, 내각 구성을 주도했으며, 초대 내각총리대신이 되었다. 한반도를 둘러싼 청나라와 러시아와의 국제 관계를 주도하며 결국 한반도의 병탄에 앞장섰고, 1905년 을사늑약 후에는 초대 통감으로서 조선 침탈의 주역이었다. 1909년 중국 하얼빈에서 한국의 청년 안중근에 의해 피격되어, 사망했다.

초기 생애

이토의 아버지는 하급 무사 가문에 입양된 사람이었다. 이토는 1603년부터 일본을 다스려온 도쿠가와 바쿠후(德川幕府)의 몰락과 일본 내의 서양 세력의 등장으로 빚어진 혼란스런 정치적 분위기 속에서 성장했다. 그는 도쿠가와 바쿠후를 전복시키고 왕정복고를 이룩한 메이지 유신(1868)에 이르는 일련의 사건에서는 큰 역할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를 통해 기도 다카요시(木戶孝允)와 같은 인물과 알게 되었는데 기도는 메이지 시대 초기의 위대한 지도자 중 한 사람으로서 이 시기 이토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스승과 같은 인물이었다. 메이지 유신이 단행되기 전인 1863년 이토는 우연한 기회에 조슈(長州)의 지도자들에게 발탁되어 서양의 해군학을 공부하러 영국으로 갔는데, 1년의 유학 기간 동안 영어를 익힌 것이 그의 큰 자산이 되었다.

정치 활동

이토는 개화파로서 일왕이 메이지 유신을 단행하는 과정에서 기여한 대가로 정계에 입문, 효고 현 지사 등 요직을 거쳤다(→ 메이지 유신). 그는 기도뿐만이 아니라 메이지 시대 초기 정계 거물인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와 연고가 있었기 때문에 미국 파견 사절단(1870)과 이와쿠라(岩倉) 사절단(1871~73)의 일원이 되어 해외에서 과세(課稅)· 예산제도·조약개정 등의 다양한 분야를 연구할 수 있었고, 그 영향으로 국가 제도 개선에 앞장설 수 있었다.

이토의 생애는 1878년 당시 정부 내에서 가장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오쿠보가 암살되면서 결정적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토는 오쿠보의 뒤를 이어 내무상으로 승진했으며 이로써 그와 마찬가지로 야심있고 재능있는 정치가인 오쿠마 시게노부(大隈重信)와 대립하게 되었다. 이토는 잇따른 정치적 수완을 발휘하여 1881년 오쿠마와 그의 지지자들을 정부에서 축출했으며 정부를 설득하여 헌법을 제정하게 했다. 1889년 일왕은 헌법 제정을 선포했고 1890년 의회가 수립되었다. 입헌정부의 수립에 대한 준비작업은 매우 착실하게 진행되었다.

헌법 제정과 의회 구성에 기여

당시 메이지 정부 내에서 가장 비중있는 인물이었던 이토를 비롯한 다른 관료들은 유럽, 특히 독일에서 거의 1년 6개월 동안 당대의 유명한 헌법학자들에게서 헌법을 공부했다. 이토의 작품인 <메이지 헌법>은 민권과 의회의 권한 등에 여러가지 제한을 두었기 때문에 독재정치를 영구화시켰다는 비난을 받아왔다. 그러나 당시 메이지 지도자들이 대부분 무사 출신이었고 그들이 직면하고 있었던 대내외적인 문제들을 감안하면 기본권 보장과 의회 수립을 명문화한 이 전례없는 조치는 진보적·계몽적인 처사라고 할 수 있다.

이토의 영향력은 1890년대를 통하여 계속되었다. 1890년대 중반에 그는 총리로서 2가지 중대한 일을 성공적으로 이루어냈다. 첫째는 영국과 조약(1894)을 맺어 1899년까지 일본 내의 영국인에 대한 치외법권을 철폐키로 한 것이었다. 이 조약에 따라 일본 내에 거주하는 영국인들은 1899년 이후 일본법의 지배를 받게 되었으며 이 조약이 선례가 되어 일본은 다른 서구열강과도 동일한 조약을 맺었다.

둘째 성과는 1895년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거둔 승리였다. 이 2가지 성과는 일본이 비(非)서구 국가들 중에서 유일하게 근대화에 성공했고 동아시아 문제에 있어서 좀더 비중있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는 명백한 증거였다. 이토는 1901년까지 4번이나 총리가 되었으나 국내 정치에 있어서는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한반도와의 관계

이토는 1884년부 갑신정변 이후 한반도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졌고, 청나라와 외교전 끝에 텐진 조약을 체결하면서 청나라의 간섭을 배제했다. 1900년대 초, 러시아가 만주를 점령하고 조선과 통상조약을 맺는 등 한반도에 대한 관심을 기울이자, 일본은 러시아를 견제한 끝에 1904년 러일 전쟁을 벌였고, 러시아에 승리하면서 포츠머스 조약을 체결하여 조선에 대한 실질적인 감독권을 획득했다. 이토는 1905년 <을사늑약>을 체결하도록 하고 12월에 조선의 초대 통감(統監)으로 부임했다. 이토는 주도면밀하게 조선을 식민지로 병탄할 계획을 수립, 근대식 교육, 경찰, 교통 제도 등을 도입했다.

1907년 고종이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밀사인 이준, 이상설, 이위종을 파견하여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려 한 것이 밝혀지자, 이토는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내정과 외교, 군권까지 장악했다. 그에 따라 한반도 전역에서 항일 활동이 전면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이토는 보안법, 신문법 등을 제정하여 항일 활동의 전파를 막았고, 군대를 폐지했으며, 일본군을 주둔시켜 강압적인 식민지화를 추진했다. 결국 이토가 강압적으로 추진한 조선 내의 여러 정책은 1910년 한일강점의 결과를 낳었다.

죽음과 평가

이토는 1909년 통감에서 물러나 일본 추밀원 원장이 되었으며, 러시아를 방문하기 위해 10월 26일 하얼빈을 방문했다. 이날, 한국의 독립운동가인 안중근(安重根)이 의장대를 사열하고 이동하는 이토를 역두에서 저격했다. 안중근은 이토에 대하여, 명성왕후를 살해하고, 대한제국 황제를 강제로 폐위시켰으며, 양민을 학살하고 이권을 약탈하는 등 동양 평화를 해치는 인물이라는 죄상을 나열하고 대한의용군 사령의 자격으로 독립전쟁을 한 것이라고 밝혔다. 이토의 장례는 국장으로 치러졌다.

이토는 일본 근대화에 기여했다는 점, 실행 가능한 일본의 헌법 체계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일본에서는 그 공적을 인정받고 있으나, 지사형이라기 보다는 타협형이었으며 실무에 밝은 사람이었다. 사생활이 문란했으며, 허장성세로도 유명한데, "술이 취하면 나는 미녀의 무릎을 베고 쉰다. 술이 깨면 나는 권력의 고삐를 힘차게 잡아쥔다"고 하여 권력에 대한 욕망을 드러낸 인물이었다. 일본 제국주의의 기틀을 만들고 동아시아에 대한 식민지 정책을 구체화하고 실행한 것도 이토였다.

통감부로 향하는 이로 히로부미 (앞쪽)
통감부로 향하는 이로 히로부미 (앞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