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쿠마 시게노부

오쿠마 시게노부

다른 표기 언어 Okuma Shigenobu , 大$重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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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38. 3. 11, 일본 사가[佐賀]
사망 1922. 1. 10, 도쿄[東京]
국적 일본

요약 차례(1898, 1914~16)에 걸쳐 총리를 역임했다. 입헌개진당을 조직하고 와세다대학을 세웠다.
덴노의 권력을 회복한 메이지 유신 뒤에 메이지 정부의 지도자들은 사가 출신 대표들을 늘림으로써 자신들의 지지기반을 확대했는데, 그는 뛰어난 능력과 대담한 성격으로 곧 정부 요직을 맡게 되었다. 처음에 재정을 맡아 일하게 된 그는 1869~81년 주로 일본 국고제도를 현대화하고 재조직화하는 데 힘썼다. 정부관료들이 새 일본 헌법규정에 대한 제안을 요청했을 때, 오쿠마는 진보적인 제안들을 내놓아 동료들을 매우 놀라게 했다. 1889년 2월 헌법이 공포되자 개진당이라는 정당을 만들어 영국 의회주의 개념에 따라 운영했다. 1898년에는 일본 최초의 정당인 자유당을 창당한 이타가키 다이스케와 합세하여 헌정당을 창당했다. 1882년 초 도쿄에 와세다대학을 세웠다.

2차례(1898, 1914~16)에 걸쳐 총리를 역임했다. 입헌개진당(立憲改進黨)을 조직하고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을 세웠다.

전통적인 교육을 받은 뒤 서양 학문에 눈을 돌려 당시로서는 드물게 영어공부를 시작했다.

덴노의 권력을 회복한 메이지 유신[明治維新]뒤에 메이지 정부의 지도자들은 사가 출신 대표들을 늘림으로써 자신들의 지지기반을 확대했는데, 오쿠마는 뛰어난 능력과 대담한 성격으로 곧 정부 요직을 맡게 되었다. 처음에 재정을 맡아 일하게 된 그는 1869~81년 주로 일본 국고제도를 현대화·재조직화하는 데 힘썼다. 정부관료들이 새 일본 헌법규정에 대한 제안을 요청했을 때, 오쿠마는 진보적인 제안들을 내놓아 동료들을 매우 놀라게 했다.

그는 이듬해에 선거를 실시할 것, 의회를 소집할 것, 영국의 경우와 같이 의회에 대해서 내각이 책임을 지는 제도를 실시할 것 등을 제안했다. 같은 해 일본 최북단 섬들 가운데 하나인 홋카이도[北海道]의 정부 재산을 매각하려는 부정행위를 폭로하기도 했다. 이같은 주장과 행동 때문에 오쿠마는 정부에서 쫓겨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헌법 제정을 위한 운동은 커다란 호응을 얻었고, 여론의 압력에 굴복하여 덴노는 1890년까지 헌법을 제정하겠다고 약속했다. 헌법은 예정보다 1년 앞서 1889년 2월 1일에 완성되어 공포되었다. 오쿠마는 개진당이라는 정당을 만들어 영국 의회주의 개념에 따라 운영했다. → 입헌개진당

1888년 다시 정부에 참여한 뒤 2차례 외무장관으로 일했다. 1898년에는 일본 최초의 정당인 자유당을 창당한 이타가키 다이스케[板垣退助]와 합세하여 헌정당(憲政黨)을 창당했다. 그들은 오쿠마를 총리로 하여 새 내각을 발족했지만 몇 달 안 되어 당직임명권 분쟁으로 총사퇴했다.

1882년초에는 일본의 2대 사립대학 중 하나인 와세다대학을 도쿄에 세웠다. 그는 1907년 정계에서 물러난 뒤 1914년 총리직에 다시 임명된 것 외에는 모든 정성을 와세다에 쏟았다. 이 시기에 일본은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급격히 늘어난 무역으로 엄청난 경제적 호황을 맞았다. 일본의 요구가 거세어 중국과의 관계가 악화되기도 했다. 오쿠마는 1916년에 사임하고 건강이 악화되어 정계에서 물러났다. 그의 장례는 국민장으로 치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