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쿠보 도시미치

오쿠보 도시미치

다른 표기 언어 Okubo Toshimichi , 大久保利通
요약 테이블
출생 1830. 9. 26, 일본 가고시마[鹿兒島]
사망 1878. 5. 14, 도쿄[東京]
국적 일본

요약 264년간 일본을 지배해온 도쿠가와 바쿠후를 무너뜨리고 덴노 정부를 다시 세운 메이지 유신의 무사 지도자 중 한 사람이다. 뛰어난 정치적 통찰력을 발휘해 일본의 대봉건영지 중 가장 막강했던 사쓰마 한에서 지도적 인물이 되었다. 이후 도쿠가와 바쿠후가 무너지면서 새로운 덴노 정부에서 지도적 인사가 되었다. 서양을 여행하고 돌아온 이후 일본 경제의 급속한 성장의 필요성을 확신한 오쿠보는 1873년 조선에 대한 정책을 둘러싸고 사이고 다카모리와 대립했다. 정한론을 주장한 사이고와 달리 일본 국내의 개혁과 성장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역설한 것이다. 고향으로 내려간 사이고는 이후 반란을 주도했다. 반론은 곧 진압되었지만 오쿠보는 1878년 불만을 품은 무사에게 암살당했다.

오쿠보 도시미치(Okubo Toshimichi)
오쿠보 도시미치(Okubo Toshimichi)

264년간 일본을 지배해온 도쿠가와 바쿠후[德川幕府]를 무너뜨리고 덴노 정부를 다시 세운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의 무사 지도자 중 한 사람이다. 이후 일본을 진취적인 국가로 만드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일찍부터 뛰어난 정치적 통찰력을 발휘하여 반도쿠가와 기류의 온상지였고 일본의 대봉건영지 중 가장 막강했던 사쓰마 한[薩摩藩]에서 지도적 인물이 되었다. 또다른 강력한 영지였던 조슈 한[長州藩]역시 반 도쿠가와라는 면에서는 사쓰마와 입장이 같았지만 이들은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러나 1866년 오쿠보와 사쓰마의 또다른 지도적 인사인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가 도쿠가와에 맞서 협력하기로 조슈와 동맹을 맺는 데 합의함으로써 이같은 상황은 바뀌었다. 그후 얼마 안 가 도쿠가와 바쿠후가 무너지고 오쿠보는 새로운 덴노 정부에서 지도적 인사가 되었다.

서양을 여행하고 돌아온 그는 일본 경제의 급속한 성장의 필요성을 확신하게 되었다. 이를 위해 그는 기술학교의 설립과 민간기업에 대한 정부 대부 및 보조금 지급, 정부 직영공장의 건설과 운영을 지원했다. 1873년 그는 조선에 대한 정책을 둘러싸고 사이고 다카모리와 갈라서게 되었다. 사이고가 정한론(征韓論)을 주장한 반면 오쿠보는 일본 국내의 개혁과 성장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오쿠보의 입장이 승리하여 일본 정부는 그의 사후인 1894년까지 이 입장을 고수했다. 사이고는 정부에서 물러나 고향 사쓰마로 되돌아가 이곳에서 불만을 품은 무사들이 일으킨 반란을 주도했다. 반란은 곧 진압되었으나 오쿠보는 1878년 불만을 품은 한 무사에게 암살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