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왕양이운동

존왕양이운동

다른 표기 언어 尊王攘夷運動

요약 극심한 빈곤 속에서 바쿠후의 정치에 불만을 품고 있던 일본의 하급 무사층은 서양 열강의 압력에 굴복해 바쿠후가 국교를 연 것에 분격했다. 1858년 다이로에 취임한 이이 나오스케가 반대파를 누르고 미일통상조약에 조인하고, '안세이의 대옥'을 단행해 존왕양이파들을 탄압했다. 외국무역에 따른 물가상승으로 생활이 더욱 힘들어진 하급 무사층은 이후 조정의 존양파 공가와 연결해 활발한 양이운동을 전개해나갔다. 그러나 공무합체파(조정과 바쿠후의 제휴에 의한 정국안정을 주장)는 1863년 정변을 일으켜 존왕양이파들을 추방했다. 또 가고시마, 시모노세키에서의 4개국 함대와의 교전을 통해 양이의 무모함을 인식하면서 양이운동은 급속히 쇠퇴했다. 이후 존왕과 바쿠후 타도로 그 운동방향을 바꾸어 메이지 유신의 원동력이 되었다.

그 사상적 기반이 된 것은 후지다 도코[藤田東湖], 아이자와 세이시사이[會澤正志齋] 등이 제창한 미토가쿠[水戶學]이다. 바쿠후는 1854년 미일화친조약에 조인하고 그 비준을 조정에 요구했다. 해외사정에 어두웠던 조정은 양이론의 거점인 미토 한[水戶藩]의 압력도 있어 칙허를 내리지 않았다.

한편 극심한 빈곤 속에서 바쿠후의 정치에 불만을 품고 있던 여러 한의 하급 무사층은 배격해야 마땅한 서양 열강의 압력에 굴복하여 바쿠후가 국교를 연 것에 분격했다. 1858년 때마침 쇼군[將軍] 계승문제를 둘러싸고 분열되어 있던 바쿠후 측에서는 이이 나오스케[井伊直弼]가 다이로[大老]에 취임하여 칙허를 기다리지 않은 채 반대파를 누르고 미일통상조약에 조인하고, 이어 '안세이[安政]의 대옥'을 단행하여 존왕양이파에 대한 대탄압을 시작했다.

외국무역에 따른 물가상승으로 생활이 더욱 힘들어진 하급 무사층은 이후 조정의 존양파 공가와 연결하여 활발한 양이운동을 전개해나갔다. 여기에 미토 한, 조슈 한[長州藩] 등이 존왕양이를 슬로건으로 내걸고 적극적으로 가담하게 되었다. 그러나 공무합체파(조정과 바쿠후의 제휴에 의한 정국안정을 주장)는 1863년 8월 18일 정변을 일으켜 존왕양이파와 조슈 한의 무사들을 추방했다. 또 가고시마[鹿兒島], 시모노세키[下關]에서의 4개국 함대와의 교전을 통해 양이의 무모함을 인식하게 되면서 양이운동은 급속히 쇠퇴했다. 이후 존왕과 바쿠후 타도로 그 운동방향을 바꾸어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의 원동력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