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토가쿠

미토가쿠

다른 표기 언어 Mitogaku , 水戶學

요약 일본 에도 시대[江戶時代] 후기 미토 한[水戶藩]에서 일어난 국가주의 사상.

미토가쿠라는 용어는 현재 미토 한의 학문 전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사용되고 있지만, 본래는 19세기 이래 미토 한에서 발달한 독특한 학풍을 가리킨다.

에도 시대에는 덴포가쿠[天保學]나 스이후가쿠[水府學]라고도 불렸고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이후 미토가쿠로 통일되었다. 미토 한에서 학문이 발달한 것은 제2대 한슈[藩主]인 도쿠가와 미쓰쿠니[德川光國]가 학자를 모아 〈다이니혼시 大日本史〉의 편찬사업에 착수하면서부터이지만, 미쓰쿠니를 중심으로 하는 전기의 학풍과 미토가쿠로 불리게 된 후기의 학풍 간에는 그 성격상 큰 차이가 있으므로 구분할 필요가 있다.

미토가쿠(Mitogaku)
미토가쿠(Mitogaku)

즉 전기의 학풍이 유학(주로 주자학) 사상을 기본으로 하여 역사의 학문적 연구에 중점을 두었던 데 비해 후기에는 오규 소라이[荻生徂徠:1666~1728]가 제창한 새로운 유학사상과 고쿠가쿠[國學] 사상의 영향을 받아 독자적인 사상을 형성해 이에 기초한 정치론을 전개하는 데 주력했다(고쿠가쿠).

미토가쿠의 형성과 관련된 최초의 인물은 후지타 유코쿠[藤田幽谷:1774~1826]이다.

그는 본기(本紀)와 열전(列傳)만을 완성한 이후 더이상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던 〈다이니혼시〉의 편찬을 맡아 이전의 본기와 열전을 교정하고 출판하는 데 노력했다. 또한 편수방침에 관해 본기와 열전만이 아니라 지표(志表)의 편수를 계속할 것, 〈다이니혼시〉라는 제목을 '사고'(史稿)로 고칠 것, 이전의 본기와 열전에 덧붙여진 논찬을 삭제할 것을 주장했다. 그의 사상을 가장 명확히 보여주는 것은 바쿠후[幕府]의 로주[老中] 마쓰다이라 사다노부[松平定信]의 요구에 응해 18세 때 저술한 〈세이메이론 正明論〉이다.

이 논문은 군주와 신하의 도리를 올바르게 하는 것이 사회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기본이라고 하여 이후의 존왕사상(尊王思想)에 이론적 근거를 부여했다. 후지타의 사상은 제자인 아이자와 야스시[會澤安 : 1782~1863]에게 계승되어 1825년 정치 쇄신과 군비(軍備) 확충을 위한 방책을 제시한 〈신론 新論〉의 저술로 결실을 맺었다.

이 책은 단순히 기술적인 의미에서 군비 확충이 아니라 국민의 의지를 통합해 자발적으로 국가목적에 협력하게 하는 것이야말로 정치의 기본이라고 주장하고 그 방법으로서 존왕과 양이(攘夷)의 2가지 방책을 들고 있어 존왕과 양이를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본 데에 특색이 있다.

원래 존왕론이나 양이론은 이전부터 제창되어왔던 것이지만, 양자를 결합시켜 논리정연한 국가주의 사상체계로 정리하는 동시에 일본 국가체제의 전통을 표현하는 '고쿠타이'[國體]라는 개념을 사용한 것은 아이자와가 처음이었다.

양자의 맥을 이은 것은 제9대 한슈 나리아키[齊昭]의 측근으로서 한[藩] 개혁의 중심인물이 된 후지타 유코쿠의 아들 도코[藤田東湖:1806~55]이다.

그는 한의 교육기관인 고도칸[弘道館:1841 개설]의 교육이념을 담은 〈고도칸키 弘道館記〉(1838)와 그 해설서인 〈고도칸키주쓰기 弘道館記述義〉(1847)에서 미토가쿠의 정신을 간결하게 설명했다.

특히 후자는 〈신론〉과 함께 미토가쿠를 대표하는 문헌으로 메이지 시대[明治時代] 이후 국민 도덕의 원형을 보여주고 있다.

이들 사상을 통해 나타나는 미토가쿠의 첫번째 특징은 학문과 정치적 실천의 일치를 지향한 데 있고, 따라서 그 학문의 내용은 종전의 학문과 달리 현실성이 짙었다. 일본의 고유사상인 신도(神道)나 고쿠가쿠[國學]를 유교사상과 결합시키고자 한 것이나, 도덕관념을 추상적인 이론이 아닌 구체적인 역사상의 사실에서 구하고 충효일치의 일본적인 도덕관념을 강조한 것도 모두 이 때문이었다.

2번째는 정치상의 문제를 한[藩]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항상 일본 전체의 국가적 견지에서 고찰하려 한 점이다. 이는 미토 한이 고산케[御三家:도쿠가와 쇼군의 일가인 세 가문] 중의 하나로 바쿠후와 운명공동체라는 의식이 강했던 것과 관련되어 있으며 따라서 미토가쿠의 존왕사상은 덴노의 전통적인 권위를 배경으로 바쿠후 권력을 강화하고 바쿠후를 중심으로 하는 국가체제를 강화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미토가쿠는 단순히 보수적인 정치사상에 그치지 않았다. 즉 현상유지가 아니라 바쿠후 중심의 정치개혁에 의해 대내외적인 국가의 위기를 극복하고자 한 것이었으므로, 개국(開國) 후 바쿠후가 이러한 기대에 부응할 수 없다는 사실이 분명해졌을 때 바쿠후에 반기를 들 수 있는 가능성을 이미 내포하고 있었다.

그러한 의미에서 미토가쿠는 근대 일본의 국가주의 사상의 주요한 원류가 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며, 실제로 요시다 쇼인[吉田松陰:1830~59] 등을 통해 메이지 정부 지도자들에게 계승되었다.